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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퐝지 Sep 06. 2020

코로나 블루를 치료할,
죽음에 관한 두 권의 책

죽은 자의 집 청소,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것 같은 요즘이다. 십여 분 단위로 쏟아지는 재난문자와 매일 쌓여가는 확진자 수, 사망자 수. 마스크를 쓰고 살아야만 하는 갑갑한 일상. 


이렇게 사는 게 살아있는 걸까. 과연 죽은 걸까. 


코로나 재유행으로 두 번째 재택근무를 겪으며 코로나 블루가 내게도 찾아왔다. 열심히 달려왔는데 세상도 멈추고 나도 방향을 잃은 것 같았다. 무언가 하고 싶다는 의욕도 없고, 매일 아침 눈을 떴을 때 살아있다는 기쁨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늘도 집 안에 갇혀 혼자 시간을 흘러 보낼 뿐일 테니까. 


고독이 권태가 되었고, 허무로 이어졌다. 그러다 쇼펜하우어를 만났다.


어떤 노력을 하고 있지 않거나 지적인 일에 몰두하지 않을 때 비로소 우리는 존재 자체로 환원된다. 무의미나 허무감은 그때 느껴지는 것이다. 권태감에서 우리가 이해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기묘하고 독특한 것을 뒤따라 달려가는 도저히 근절할 수 없는 성향을 가지고 있고, 너무나 지겹도록 똑같은 만물의 질서를 멈출 때 또 기뻐한다.


권태와 허무함 속에서야 비로소 실존을 바라볼 수 있다. 달려가야 할 목표가 없을 때, 만족스럽기도 그렇지 않기도 한 모호한 상태에서야말로 삶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삶이 필연적으로 도달할 죽음에 관한 책을 읽고 삶의 태도를 다잡고 싶었다. 서점에 갈 때마다 시선을 사로잡았던 <죽은 자의 집 청소>,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준 스테디셀러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을 읽었다.


죽은 자의 집 청소


특수 청소라는 직업이 있다. 남들이 꺼려하는 공간을 청소해주고 보수를 받는 일이다. 죽은 자가 숨을 거두었던 자리, 죽음의 흔적과 부패로 물든 집안을 청소하는 의뢰가 주를 이룬다. 갑작스러운 죽음, 고독사, 그리고 자살한 사람들의 자리를 치우는 경우가 많다.


전기가 끊기는 마지막 날 스스로 숨을 거둔 사람, 집안 가득한 빨간딱지들 사이에서 죽음을 선택한 노부부. 망자들이 남긴 흔적을 정리해달라는 의뢰는 보통 죽은 자들의 가족 또는 건물주나 집주인들이다. 


그들의 마지막 자리, 청소를 하며 자연스럽게 보게 되는 망자의 서가와 물건을 보며 작가는 상념에 빠진다. 무엇이 이들을 죽음으로 이끈 걸까. 작가가 그들의 흔적을 치우며 스스로를 돌아보는 과정들도 인상 깊다. 작가는 죽은 자의 집을 청소하며 자신의 내면을 바라본다. 


작가가 죽음의 적나라함을 마주하며, 우리에게 남기는 메시지가 와 닿는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죽음에 대해 경도되고 그 엄숙함에 지나치게 몰입한 탓에 죽음에 관한 언급 자체를 불경한 일로 여겼습니다. 어쩌면 이 기록도 그런 면에서는 급진적이라고 할 만한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죽음을 돌아보고 그 의미를 되묻는 행위, 인간이 죽은 곳에서 더 선명하게 드러나는 삶과 존재에 관한 면밀한 진술은 오히려 항바이러스가 되어 비록 잠시나마 발열하지만 결국 우리 삶을 더 가치 있고 굳세게 만드는 데 참고할 만한 기전機轉이 되리라 믿습니다. 누군가의 죽음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직업적인 아이러니 속에서 이 기록이 그 역할을 하리라는 믿음, 나에게 주어진 사회적 책무라는 자각이 글쓰기를 멈추지 않도록 다독여주었습니다.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보통의 현대인처럼 바쁜 삶을 살아가던 작가가 루게릭 병으로 죽어가던 은사인 모리의 소식을 듣고 화요일마다 그를 찾아간다. 죽음과 삶에 대한 모리의 생각을 들으며 그의 삶은 변화했다. 모리와 나눴던 이야기를 책으로 엮었고, 20년 넘게 수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았다.


죽음, 용서, 문화 등 여러 가지 주제에 관해 그가 남겼던 이야기가 주옥같아서 정리해봤다.


누구나, 아니 나는 언젠가 죽는다

모리 교수님이 이야기한 것처럼 “어떻게 죽어야 할지 알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게 된다.”라는 조언이 바로 이 책의 주제입니다. 삶이 영원히 계속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아야만 삶을 소중히 여기게 되지요. 세상에서 보낼 날이 정해져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루하루를 최우선으로 삼게 됩니다.
“죽을 준비란 어떻게 하나요?”
“불교도들이 하는 것처럼 하게. 매일 어깨 위에 작은 새를 올려놓는 거야. 그러곤 새에게 ‘오늘이 그날인가? 나는 준비가 되었나? 나는 해야 할 일들을 제대로 하고 있나? 내가 원하는 그런 사람으로 살고 있나?’라고 묻는 거지.”
그는 정말로 새가 얹혀 있기라도 한 듯이 어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늘이 내가 죽을, 바로 그날인가?”
우리의 문화는 죽음이 임박할 때까지는 그런 것들을 생각하도록 놔두질 않는다네. 우리는 이기적인 것들에 둘러싸여서 살고 있어. 경력, 가족, 또 주택 융자금을 갚아 낼 돈은 충분한가, 새 차를 살 여유가 있는가, 고장 난 난방 장치를 수리할 돈이 있는가 등등…….

우린 그냥 생활을 지속시키기 위해 수만 가지 사소한 일들에 휩싸여 살아. 그래서 한발 뒤로 물러서서 우리의 삶을 관조하며 ‘이게 다인가? 이게 진정으로 내가 원하는 건가? 뭔가 빠진 건 없나?’ 하고 돌아보는 습관을 갖지 못하지.



자신만의 문화를 창조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우리 문화는 사람들에게 행복감을 느끼지 못하도록 하네. 우린 거짓된 진리를 가르치고 있어. 그러니 스스로 제대로 된 문화라는 생각이 들지 않으면 그것을 굳이 따르려고 애쓰지 말게. 그것보다는 자신만의 문화를 창조해야 해.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못하네. 그래서 그들은 나보다 훨씬 더 불행해. 이런 불편한 상황에 처한 나보다도 말이야.”
교수님에게 남은 시간이 점점 줄어든다는 것이 슬프면서도 그가 보내는 질 높은 시간들이 묘하게 부러웠다. 우리는 왜 이렇게 의미 없는 짓들을 할까? 미국에서는 사람들이 O. J. 심슨의 재판을 지켜보느라 점심시간 전부를 다 써 버렸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보지 못한 부분을 집에서 마저 보려고 녹화해 두곤 했다. 그들은 O. J. 심슨과 아는 사이가 아니었다. 이번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 중에 아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다들 몇 날 며칠 몇 주일을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 사람의 드라마에 빠져 살았다.
의미 없는 생활을 하느라 바삐 뛰어다니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자기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느라 분주할 때조차도 그 절반은 자고 있는 것과 같지. 엉뚱한 것을 좇고 있기 때문이야. 인생을 의미 있게 보내려면 자신을 사랑해 주는 사람들을 위해서 살아야 하네. 자기가 속한 공동체에 봉사하고 자신에게 생의 의미와 목적을 주는 일을 창조하는 것에 헌신해야 하네.
“다들 잠든 채 걸어 다니는 것처럼 살고 있기 때문이지. 우린 세상을 충분히 경험하지 못하고 있어.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일을 기계적으로 하고, 반쯤은 졸면서 살고 있거든.”
“그럼 죽음에 직면하면 모든 게 변하나요?”
“그래. 모든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다 벗겨 내고 결국 핵심에 초점을 맞추게 되지. 자기가 죽게 되리라는 사실을 깨달으면 모든 일들이 아주 다르게 보인다네.”


감정이 나를 꿰뚫고 지나가도록 하자

필요하면 한바탕 시원하게 울기도 해. 하지만 그런 다음에는 내 인생에서 여전히 좋은 것들에만 온 정신을 집중하네. 나를 만나러 와 줄 사람들, 내가 앞으로 들을 이야기에 대해서 말이지. 
“경험하라고 하시면서 또 벗어나라고 하시는 말씀은 도대체 무슨 의미죠?”
“음, 자네도 거기에 대해 생각을 하고 있었군. 하지만 벗어난다고 해서 경험이 우리를 꿰뚫고 지나가지 못하게 한다는 뜻은 아니야. 반대로 경험이 자네를 온전히 꿰뚫고 지나가게 해야 하네. 그렇게 해야만 거기에서 벗어날 수 있어.”
“하지만 이런 감정들에 온전히 자신을 던져서 스스로 그 안에 빠져들도록 내버려 두면, 그래서 온몸이 거기에 빠져들어 가게 되면 그때는 그 감정들을 제대로 경험할 수 있게 돼. 고통이란 게 뭔지를 알게 되는 거지. 또 사랑이나 슬픔이 뭔지도 알게 되네. 그럼 그제야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좋아, 난 지금껏 그 감정을 충분히 느꼈어. 이젠 그 감정을 너무도 잘 알아. 그렇다면 이제 잠시 그 감정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겠군.’이라고 말이야.”
수도꼭지를 틀어 놓고 감정으로 세수를 한다. 그렇게 하면 오히려 큰 도움이 되고 마음이 상하지 않는다. 두려움이 안으로 들어오게 내버려 두고 그것을 늘 입는 셔츠처럼 입어 버리면 자신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좋아, 이건 그냥 두려움일 뿐이야. 요놈이 나를 좌우하게 내버려 두지 않을 거야. 이 감정을 있는 그대로 보자고.”

외로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외롭다면 감정을 풀어놓고 눈물을 흘리며 충분히 느낀다. 그러면 결국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된다.

“좋아, 그건 내가 쓸쓸함을 느끼는 한순간일 뿐이야. 난 쓸쓸함을 느끼는 게 두렵지 않아. 하지만 지금은 이 감정을 옆으로 밀어 놓고 이 세상에 있는 또 다른 감정을 맛봐야겠어. 다른 것들도 경험해 보자고.”


자신을 용서할 줄 알자

“그리고 우리가 용서해야 할 사람은 타인만이 아니라네. 미치, 우린 자신도 용서해야 해.”
“우리 자신을요?”
“그래. 여러 가지 이유로 우리가 하지 않은 일들에 대해서 용서해야 하네. 했어야 하는데 하지 않은 일에 대해서 말이야. 일이 이러저러하게 되지 않았다고 자신을 탓할 수만은 없지. 나 같은 상황에 빠지면 그런 태도는 아무런 도움도 안 돼”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

어떤 나이든 될 수 있다는 걸 생각해 보게. 지금 이 나이에 이르기까지 모든 나이가 다 내 안에 있다네. 이해가 되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다 거쳐 온 시절인데 자네가 있는 그 자리가 어떻게 부러울 수 있겠나?”

“살아가면서 현재 자신의 인생에 무엇이 좋고 진실하며 아름다운지를 발견해야 하네. 뒤돌아보면 경쟁심만 생기지. 하지만 나이는 경쟁할 만한 문제가 아니거든.”



세상이 멈춘 지금, 나도 잠깐 쉬어가면 뭐 어떤가.

지금이야말로 삶의 의미를 돌아보기 좋은 시기인 것 같다.

나에게 외부적 자극을 주지 않을 때에야 말로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테니까.


매일 밤, 잠자리에 들 때면 나는 죽는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에 잠에서 깨면 나는 다시 태어난다.

-마하트마 간디


이 문장을 마음에 새기고 하루하루 살다 보면 내가 원하는 삶에 가까워지리라 믿는다. 

모두가 힘든 이 시기는 분명 지나간다. 그때까지 집콕하며 내 마음을 잘 살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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