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유석의 <쾌락독서>
<쾌락 독서>는 작년 독서모임 멤버들과 만났다가 추천받아서 읽게 된 책이다. 어쩌다 보니 최근에 문유석 판사의 책 대부분을 읽게 되었다. <쾌락 독서>는 마치 푸근한 동네 아저씨와 책에 관해 수다 떠는 느낌이다. 그가 읽었던 책들과 에피소드를 풀어내는 동안, 나도 어릴 적 읽었던 책들과 그때 느낌에 대해 떠올렸다.
계기는 생각나지 않지만 중학교 시절에 문득 평소에 거들떠보지 않던 세계명작을 한 권 뽑아서 읽었다. 에드가 앨런 포의 <모르그 가의 살인사건>이었는데, 아마 '살인'이라는 자극적인 단어가 눈길을 사로잡았던 것 같다.
그 책을 시작으로 추리소설의 매력에 푹 빠져서 한동안 동네서점을 찾아가서 에드가 앨런 포의 책들을 찾아 읽었다. 지금은 사라진 성현 문고라는 동네 서점과 엄마한테 혼날까 봐 차마 책은 도서관에서 빌려 읽고 그 서점에서는 게임 CD만 왕창 샀었다. '쿠키샵'이랑 '스위키 랜드'를 샀었는데, '스위키 랜드'는 막 서울에서 직장을 구한 막내 이모를 졸라서 받아냈었다.
에드가 앨런 포로 시작했던 세계 명작 읽기에서 몇 가지 뽑아 읽어보다가 재미를 붙여서 고전의 참맛을 뒤늦게 느꼈던 기억이 있다.
<쾌락 독서>는 마치 이런 느낌이다. 작가가 어릴 적부터 최근까지의 독서 경험에 대한 썰을 한 보따리 풀어놓으면 그걸 읽다가, 생각지도 못했던 나의 기억의 조각들을 찾아가는 느낌이라고 할까.
한편, 이 분 괜찮을까 싶던 내용들이 있었다. ㅋㅋ
사춘기의 혈기 왕성한 시기에 탐독했던 서적 리스트를 가감 없이 소개해주었는데, 정말.. 정말.. 이렇게 솔직하게 소개해주셔도 되는 걸까. 사람이 기록을 남기면 설령 그곳이 일기장일지라도 읽힘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에 100퍼센트 솔직해질 수 없다고 생각하건만. 그는 날것의 남녀 간의 뜨거운 사랑 이야기가 담긴 독서 리스트를 공개했다. 그렇다면, 저자도 사람이라면 공개한 책들 외에 숨긴 책들이 더 있을 것만 같아서. 세상에나 상상도 안 간다. ㅋㅋ
킥킥거리면서 읽은 부분이 많았는데, 특히 작가가 <책은 도끼다>를 언급한 부분에서 빵 터졌다.
<책은 도끼다>는 저자가 꼽은 문학 작품에 대해 자신의 생각과 발견을 풀어놓은 책인데, 그 시각과 감성이 독특하고 감미로워서 읽는 이를 문학과 사랑에 빠지게 한다. 나는 <책은 도끼다>에 소개된 책을 다 따라가며 읽느라 무려 2년 동안이나 이 책을 읽고 있다. 저자의 문학에 대한 감상이 너무나 감미로워서 초콜릿처럼 아껴서 읽고 있다. 그런데 이 감미로운 책에 대해 문유석 작가가 언급한 부분이 너무 웃겨서 현웃했다.
전체적인 작품의 주제나 시대적 배경, 역사 등보다 마음에 드는 캐릭터에만 집중해서 소설을 읽는 내 습성은 박경리의 <토지>를 읽을 때도 계속되었다.
심지어 후반부에 와서는 관심 없는 부분은 휙휙 넘겨버리면서 보고 싶은 부분만 찾아 읽기도 했다. 한국문학사에 길이 남을 이 대하소설에서 나는 일종의 멜로드라마적인 재미가 있는 부분만 집중적으로 읽은 것이다.
이쯤 되니 독서를 주제로 책을 쓰기 시작한 나 자신이 무모하게 느껴질 지경이다. 도대체 <책은 도끼다> 같은 책은 어떻게 쓰는 걸까? 어떻게 그렇게 책의 한 구절 한 구절에 대해 폭포수 쏟아지듯 감상을 이야기할 수 있는 지... 당최 그 정도로 섬세한 감성이라고는 타고나지 못한 시큰둥한 나 자신을 잠시 원망해보았지만, 뭐 세상에는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는 거지.
마찬가지로 독서도 이런 독서도 있고 저런 독서도 있는 거다. 카프카는 책이 우리 머리를 주먹으로 쳐서 잠에서 깨우지 않는다면 도대체 왜 책을 읽는 거냐며 책이란 무릇 우리 안에 있는 얼어버린 바다를 깨뜨려버리는 도끼가 아니면 안 된다고 일갈했지만, 수사법은 수사법일 뿐, 책은 도끼일 수도 있고 심심풀이 땅콩일 수도 있고 잠을 재워주는 수면제일 수도 있는 것 아닐까. 책마다 사람마다 다양한 용법이 있기 마련이다.
"이쯤 되니 독서를 주제로 책을 쓰기 시작한 나 자신이 무모하게 느껴질 지경이다"라는 말을 세상에 자신이 쓴 책에 하다니. 킥킥거리는 웃음이 번지기 시작하다 <책은 도끼다>를 언급하며 잠시 자신을 원망했다는 표현에 빵 터졌다.
그러다가 그의 사색이 도달한 결론이 퍽 마음에 들었다.
독서도 이런 독서도 있고 저런 독서도 있는 거다.
책은 도끼일 수도 있고 심심풀이 땅콩일 수도 있고
잠을 재워주는 수면제일 수도 있는 것 아닐까.
항상 책을 읽고 감명받거나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는 부담 없이, 그저 책 읽기를 하나의 유희로 즐겨도 된다는 편안한 마음가짐. 나는 올해 매주 독후감을 쓰기를 하고 있는데, 언젠가부터 책을 고를 때 지식을 얻을 수 있거나 깨달음 또는 감성을 깨워줄 수 있는 책들을 읽어야 한다는 무언의 압박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쾌락 독서> 덕분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래, 즐거우려고 독서하는 거지.
문유석 작가의 책을 읽으며, 글이 꼭 무거울 필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판사이기에 그의 글이 많이 알려진 점도 있지만 읽는 이를 킥킥거리게 하는 그의 글은 충분히 읽힐만하다. 그리고 나도 조금 더 글을 가볍게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번 독후감은 참 즐겁게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