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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퐝지 Jun 02. 2019

개인주의라 쓰고
행복이라 읽겠다

문유석의 <개인주의자 선언>

<개인주의자 선언>은 <판사유감>의 이후의 작품이다. <판사유감>이 법관으로서의 그의 소고라면,  <개인주의자 선언>은 그의 일상에 대한 소고이다. 일부는 개인주의자라 선언한 그의 철학들, 일부는 현실 사회와 일상에 대한 그의 사유들로 짜여있다.


그의 생각들에 공감할만한 부분이 많았다. 소위 꼰대가 아니라, 요즘 젊은이들의 심정을 이해하는 기성세대의 위로 같다고나 할까. 


개인주의와 행복

누구나 행복해지고 싶다는 것에 반박하긴 힘들 것이다. 우리는 삶의 이유를 행복해지기 위함에 둔다. 그러나 어렴풋이 떠올리는 행복에 대한 개념은 개인마다 다르다. 저자는 서은국 교수의 저서를 요약해 행복에 대해 말한다.

우리는 인간의 관계 속에서 가장 많은 행복을 느낀다.
서은국 교수의 <행복의 기원>에 따르면, 행복감이란 결국 뇌에서 느끼는 쾌감이다. 뇌가 특정한 종류의 경험들에 대해 기쁨, 즐거움, 설렘 등의 쾌감을 느끼도록 진화한 것이다. 그런데 실증적 연구 결과, 인간이 행복감을 가장 많이, 자주 느끼는 원천은 바로 인간이었다. 가족, 연인, 친구, 동료 ... 인간은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가장 많은 쾌감을 느끼는, 뼛속까지 사회적인 동물이었던 것이다.
돈은 어느 정도의 문화적 생활이 가능한 수준을 넘어서면 행복감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가장 행복감을 느끼는 그룹의 사람들은 천성적으로 사회성이 높은 외향적인 성격이었다.

행복해지기 위한 전략에 있어서 큰 것 한 방보다 다양하고 자잘한 즐거움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것이 압도적으로 유리한다고 한다.

개인주의에 대한 존중이 행복을 높인다.
서은국 교수에 따르면 행복감을 예측하는 가장 중요한 문화적 특성은 개인주의고, 북미나 유럽 국가들의 행복감이 높은 이유는 높은 소득보다 개인주의적 문화 때문으로 본다. 스칸디나비아 행복의 원동력은 넘치는 자유, 타인에 대한 신뢰, 그리고 다양한 재능과 관심에 대한 존중이라는 것이다. 빈부격차가 심하고 인종 문제가 심각하며 선진국 중 강력범죄율이 가장 높은 미국도 15위로늘 행복지수 상위권이다. 집단주의로 인한 압력에 짓눌리지 않고 각자 제 잘난 맛에 사는, 서로 그걸 존중해주는 개인주의 문화의 강력함이다. 집단주의 문화권으로 분류되는 동아시아 경제 우등생들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나에 대한 존중과 그리고 그만큼 타인에 대한 존중이 기반한 사회, 다양성이 공존하는 사회에서 개인은 행복해질 수 있다. 모든 사람이 똑같은 가치를 추구해야하는 사회에서 개인은 행복해질 수 없다.


인간은 누구나 최소한 한 가지 재능은 가지고 있다.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주는 재능
인간은 본능적으로 인간에게 끌린다. 진화심리학적으로 인간에게 있어 동료 인간이 가장 큰 행복의 원천이라는 점은 미래에도 유지될 것이다. 그렇다면 아무리 기계가 발전해도 인간은 대체불가능한 자원일 수 있다. 인간은 누구나 최소한 한 가지 재능은 가지고 있다.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주는 재능 말이다. 가족에게, 친구에게, 연인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어주는 재능. 

미래가 아무리 급격하게 변한다고 한들, 인간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고 그 관계 속에서 행복을 느낀다. 그러므로 미래에 노동력을 상실할지라도, 모든 인간은 중요한 존재이다. 왜냐하면,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후. 나는 누구를 행복하게 해주는 거지.



그냥 남을 안 부러워하면 안 되나.

'남부럽지 않게' 살고 싶다는 집착 때문에 인생을 낭비하는 이들을 접할 때마다 드는 생각이 있다. 그냥 남을 안 부러워하면 안 되나. 남들로부터 자유로워지면 안 되는 건가. 배가 몇 겹씩 접혀도 남들 신경 안 쓴 채 비키니 입고 제멋으로 즐기는 문화와 충분히 날씬한데도 아주 조금의 군살이라도 남들에게 지적당할까봐 밥을 굶고 지방흡입을 하는 문화 사이에 어느 쪽이 더 개인의 행복에 유리할까. 우리가 더 불행한 이유는 결국 우리 스스로 자승자박하고 있기 때문 아닐까.

읽고 속이 시원해졌다. 그냥 남을 안 부러워하면 안 되나.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고, 개인의 행복을 중요시하다보면 우리 사회도 조금씩 쿨하게 변할 수 있을 것만 같다. 



노력에 앞선 성찰이 필요하고, 

때로는 부당에 대한 분노가 필요하다.

물론 노력은 소중하고 필요한 것이지만 맹목적인 노력만이 가치의 척도는 아니다. 무엇을 위해 노력하는지 성찰이 먼저 필요하고, 노력이 정당하게 보상받지 못하는 구조에 대한 분노도 필요하다. 가장 위험하고도 어리석은 건 '노력해야 성공한다'를 넘어서 '성공한 이들은 다 처절하게 노력했기에 그 자리에 오른 것이다' '그만큼 노력하여 성공한 이들이니까 괴팍하고 못되게 굴 만하다' '강한 것은 아름답다' 등으로 끊임없이 가지를 치는 스톡홀름증후군이다. 스티브 잡스가 매혹적이라 하여 그의 괴팍함과 못된 점조차 찬양할 필요는 없다. 훌륭한 점과 비판받아야 할 점은 냉정하게 분리해 평가해야 한다. 그리고 대체로 성공에는 재능과 노력이 필요한 건 사실이지만, 유감스럽게도 현실사회에는 그저 우연히 부모 잘 만나서 과분한 기회를 누리며 사는 이들도 많다. 

저자가 이 글을 썼던 시점보다는 현재 4년 지났기 때문에 이런 생각이 어느 정도 보편화되었다고 생각한다. <하마터면 열심히 살뻔했다>라던지, 요즘 젊은 세대들이 YOLO 해버리는 것이라든지 말이다. 


요즘 젊은이들이 정말 미친 듯이 무언가 성취하려고 불나방처럼 달려들지 않는 것은, 상황이 매우 다르기 때문이다. 학창시절부터 취업까지, 취업 후 직장생활에서도 매사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 돌아오는 것은 그냥 조금 더 많은 월급 정도이다. 그리고 그 약간의 월급으로는 이전 시대처럼 부동산 투자를 통해 자산을 구축한다던가 

뭔가 새롭에 일구기엔 불가능하다. 


우리는 이제 안다. 소소한 행복을 자주 이어가는 것이 우리의 삶을 더욱 윤택하게 한다는 것을. 그래서 맹목적인 노력을 믿지는 않는다. 무언가를 성취하기 위해 노력했던 것인데, 그 성취를 왜 하고 싶었는 지 돌이켜 보면 '행복'하기 위함이었던 것을 아니까 말이다.



개인주의는 나,

그리고 우리가 행복해지는 것이다.

저자는 자신의 행복이 우선인 것이 죄악이 아니라는 개인주의에서 시작하지만, 결국 인간은 사람 간의 관계 속에서 행복을 얻어간다고 말한다. 결국 자신 뿐 아니라 타인의 행복도 함께 고려할 때 더욱 행복해질 수 있다고 말하는 것 같다.


<개인주의자 선언>의 마지막 문장이 마음속을 맴돈다.

한 개인으로 자기 삶을 행복하게 사는 것만도 전쟁같이 힘든 세상이다. 학교에서 살아남기 위해, 입시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취업 관문에서 살아남기 위해, 결혼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직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일하며 아이를 키우는 고통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 아이가 다시 이 험한 세상에서 살아남도록 지키기 위해.
그런 개인들이 서로를 보듬어주고 배려해주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인가. 또 그렇기에 얼마나 귀한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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