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이니까 설에 세뱃돈 때문에 삐진 썰 풀어본다.

마이 삐졌다 아이가!

by 강승원

친할머니는 나를 정말 하나도 예뻐하지 않으셨다. (아니 그게 아니고 차라리 귀찮아하시거나 싫어하셨다는 표현이 훨씬 정확하다.) 왜냐하면 나는 둘째 아들에게서 난 손주였기 때문이다. 나는 한 번도 친할머니에게 예쁨과 귀여움 같은 것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그래도 나는 상관없었다. 나에게는 나를 진심으로 사랑해주고 예뻐해 주시는 외할머니가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외할머니 또한 첫째 아들에게서 난 장손을 가장 예뻐하셨다. 하지만 그다음으로 예뻐하는 손주는 바로 나라는 확신이 내겐 있었다.)

친할머니는 큰 아버지와 큰 어머니, 사촌 형, 사촌 여동생 이렇게 4 식구를 데리고 함께 사셨다. 큰 아버지는 평생을 직장 한번 가져본 적 없이 노름에만 빠져 살았던 인물이었기에 할머니와 큰 어머니가 그 집안의 가장이었다.

그 집에 사는 사촌인 성원이 형은 나보다 나이가 5살 정도가 더 많았다. 여사촌인 미진이는 나보다 5살 정도가 어렸다. 그들은 친할머니의 사랑을 독차지받았다. 할머니의 자신의 오줌똥 수발을 미진이가 들어줄 것이고 죽은 뒤의 제사는 성원이 형이 지내줄 거라는 속내가 포함되어 있는 매우 조건부의 사랑이었다. 물론 재밌게도 할머니의 오줌똥 수발과 제사는 할머니가 가장 미워하고 못마땅해 늘 구박만 하시던 우리 어머니의 전담이 되었지만 말이다. 참 좆같은 일이 아닐 수 없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쯤이었나 성원이 형과 미진이, 나 이렇게 세명은 나란히 서서 할머니에게 세배를 올렸다. 성원이 형은 5만 원, 미진이는 3만 원, 나는 500원 (믿기지 않겠지만 진짜다.) 각자의 손에 세뱃돈이 쥐어졌을 때 나는 돈을 너무 적게 받은 게 문제가 아니라 아 나는 "이 친가라는 곳에서 나란 존재는 겨우 이 정도인 아이였구나."라는 사실에 너무나도 큰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아무리 그래도 돈의 액수로 그렇게까지 노골적으로 표현하실 필요가 있었을까?


내가 중학생이 되던 무렵이었나 할머니와 큰 아버지의 가족들은 할머니의 낡은 집이 창신역의 재개발 공사 때문에 꽤나 큰 보상을 받게 되어 20평이 채 안 되는 신축 빌라에 이사를 가게 되었다.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큰 아버지는 그 작고 볼품없는 집이 어찌나 탐이 나셨는지 할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하여 그 집의 권리를 빼앗고 할머니를 집에서 쫓아내 버렸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말이다. 할머니는 그날 이후로 첫째 아들과 연을 끊으시고 둘째 아들의 집인 우리 집에서 남은 여생을 머물다 가셨다.


할머니와 나는 그날 이후로 단 한마디의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솔직히 내가 할머니에게 곰살맞게 굴어야 할 일도 없었고 할머니도 애써 내게 대화를 건네지 않으셨다. 나는 할머니가 있는 집이 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나도 불편해서 그날 이후로 빨리 집에서 나가 독립해 사는 게 소원이 될 지경이었다. 큰 아버지에게 매 맞고 집을 빼앗기고 쫓겨난 할머니가 안쓰럽기도 하였지만 솔직히 말해서 내 알바는 아니었다.


어느 날 내가 27살 즈음 되던 무렵, 큰 아버지 일가에게 전화가 왔다. 내용을 듣자 하니 "성원이가 곧 장가를 가야 하는데 집안과 연을 끊게 된 것을 사돈집에서 알게 되면 결혼식에 지장이 생기니 할머니를 비롯하여 고모들부터 우리 아버지까지 꼭 결혼식에 와주었으면 좋겠다."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그 말을 엄마에게 전해 듣고 "사람의 탈을 썼다해서 모두가 사람인 것은 아니구나."라는 사소한 진실을 절절히 실감하게 되었다.

나는 어른들이 당연히 그 말을 무시하고 넘어갈 줄 알았는데 며칠 지나지 않아 결국 그것을 화두로 우리 세 가족과 할머니, 큰 아버지 일가는 어느 횟집에서 자리를 갖게 되었다. 피라는 게 그래서 무서운 것이다. 큰 아버지는 별다른 사과도 딱히 없으셨고 그 자리는 알 수 없는 적막함과 덧없이 무거운 분위기로만 가득 차 있었다.

할머니는 큰 아버지 일가에는 눈도 마주치지 않으며 그날따라 괜히 나에게 말을 거시고 횟집에 나오는 비싼 생선이나 반찬이 나오면 자꾸만 내 앞접시로 건네주시며 어서 그것을 먹으라며 성화를 부리셨다.

그건 정말이지 미진이와 성원이 형에게 보여주기 위한 퍼포먼스였다. "이제 너네는 나에게 중요한 손주들이 아니다. 이제 내가 편애하는 손주는 승원이다."라는 것을 그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물론 그들은 그걸 보고도 아무 생각이 없는 눈치였지만 말이다. 그저 나만 괜스레 기분이 나빠져 할머니가 건네주신 것들은 건드리지도 않았다. 뭐가 목구멍으로 넘어갈 자리도 아니었던 데다가 할머니의 침이 닿은 젓가락으로 건네주시는 게 너무 싫었다. 솔직하게 말해서.


할머니는 그 이후로 얼마 지나지 않아 심한 치매에 걸리셨고 그 뒷바라지는 온통 어머니의 독차지가 되었다. 아버지는 엄청난 효자여서 늘 "우리 어머니, 불쌍한 우리 어머니." 하시며 지극 정성으로 할머니의 안부를 걱정하였지만 똥오줌을 치우거나 할머니의 밥을 차리고 떠먹이는 건 늘 우리 엄마의 몫이었다. 나는 그 꼴이 너무 보기 싫어 집에만 가면 차라리 눈을 질끈 감고 지내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 시절 집에는 온통 할머니의 똥 냄새가 진동을 하였다. 그래서 나는 어떻게든 집으로 돌아가지 않으려 애썼다. 여자 친구의 원룸(지금의 와이프)에 얹혀서 몇 년을 지내고 사무실에서 라꾸라꾸를 펼치고 2년 동안을 숙식을 해결하는 식으로 말이다. 아무리 비참한 꼴이어도 그곳에 돌아가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 나도 참 개새끼였다. 하지만 내가 그때 당시에 할 수 있는 행동의 폭은 그리 넓지 못했다. 그게 유일한 핑계라면 핑곗거리겠지만 말이다.


할머니께서 돌아가신 뒤, 몇 달이 지나지 않아 아버지는 이내 돌아가셨다.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친가의 몇몇 사람들은 아버지가 너무나 효자라서 할머니께서 돌아가신 것을 참지 못하여 저승에 계신 할머니를 모시고 싶은 마음에 쫓아간 거라는 둥의 말을 나와 엄마가 듣는 곳에서 아무렇지 않게 지껄였다. 미친 인간들.


엄마는 아직도 할머니의 제사를 지내신다. 나는 제발 그 짓을 멈추면 안 되겠냐고 늘 따지듯 묻지만 엄마는 늘 "너는 모르는 소리 하지 말아라. 다 너를 위해서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너에게 복을 주라고 하는 것이고 자기가 좋아서 하는 것이니 너는 행여나 그런 말 말아라."라고 얘기하곤 하신다. 마치 돌아가신 할머니가 들을까 무섭다는 표정을 지으시며 말이다. 참 기복 신앙이라는 것은 웃기고 웃기고 웃긴 것이다. 나는 기복 신앙을 믿지 않는다. (사실 그 어떤 종교도 믿지 않는다.) 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돌아가신 할머니께서 정말 누군가의 복을 주고 뺏을 수 있는 권능을 저승에 갔다는 이유로 받게 되었다면 정말 우리 엄마에게는 자신이 줄 수 있는 복은 다 건네주고 어디 다른 유령에게라도 빌려와서라도 건네주어야 할 것이다. 정말.


나는 할머니가 나에게 세뱃돈으로 오백 원을 건네주었던 것보다 내 앞 접시에 비싼 생선회를 올려주셨을 때가 사실 더욱 밉고 싫었다.

정말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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