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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승원 Apr 13. 2022

코로나가 내게 남긴 것들

코로나, 멈춰!

코로나 얘기는 솔직히 말해서 에세이에 적고 싶지도 않은 마음이었다. 정말 지긋지긋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정말 코로나가 막바지에 이르렀지 않나 하는 마음으로 그동안 코로나로 인해 잃은 것들 그리고 얻은 것들에 대해 한번 적어보고 싶었다.


난 2주전 화요일에 코로나 확진 판정을 받았다. 아침부터 목이 칼칼하고 잔기침을 해대고 몸이 으슬으슬한 느낌을 받아 검사를 해보니 아니나 다를까 역시나 코로나였다. 아마도 그 지난주에 코로나에 걸렸던 와이프와 아들에게 옮은 듯했다. 우리 세 가족은 불행 중 다행으로 코로나로 인해 심한 증세는 오지 않았다. 사실 이 정도면 독감이 훨씬 아프고 위험하지 않나 싶을 정도로 말이다. 그래서 "차라리 이렇게 걸려버린 게 다행이다."라는 말까지 와이프랑 주고받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내 글을 읽고 아직 코로나에 걸리지 않은 사람들이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누군가에게는 코로나는 아직도 치명적일 수 있고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는 병이기도 하니 말이다.


처음 코로나라는 증상이 발병되었을 때가 나는 잊히지 않는다. 팬데믹에 의한 집단적인 히스테리는 나에겐 광기처럼 느껴졌었다. 초창기 코로나에 걸린 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은 전 국민에게 공개되어 "이 사람이 바람을 피웠다.", "노래방 도우미로 일했다." 등등 그 사람의 모텔 방문 기록 등의 사생활까지 전부 노출시켜 전 국민에게 손가락질과 비난을 받게 했던 일들은 "정말 우리가 자유 민주주의 공화국에서 살아가고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들었던 사건이었다. 물론 그들이 떳떳한 직업을 가지거나 올바른 행실을 했던 건 아니었겠지만 모든 사생활이 전 국민에게 노출될 이유는 또한 없는 것이었다. 나는 그게 일종의 광기 아니었나 라는 생각이 들뿐이다.


아들을 끔찍이도 아끼는 와이프에게 있어 코로나는 극도의 공포의 대상이었다. 나는 물론 이 점에 대해 정말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바이다. 하지만 우리는 코로나 때문에 정말 한계점에 이를 정도로 사이가 멀어졌던 시기가 있었다. 그 시절 와이프에게 있어 나는 거의 병균 덩어리 취급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밖에 나가서 일을 하고 돌아오는 내가 언제 코로나를 집 안으로 옮겨올지 모른다는 공포가 와이프를 사로잡았다. 내가 집 문을 열고 돌아오자마자 3초도 지나지 않아 와이프는 달려와 소독약이 담긴 스프레이를 내 온몸에 뿌려대며 "왜 빨리 손을 안 씻느냐."며 나를 닦달해댔다. 채 신발도 벗지 않은 상황이었는데 말이다. 밖에서 입은 옷은 절대 집 안의 가구 및 바닥, 그 어디에도 닿으면 안 되었고 나는 집에 있는 동안에는 손을 하루에 40번은 씻었어야 했다. 와이프는 아이를 어린이집, 유치원 그 어디에도 보내지 않고 거의 2년간을 자신과 아이를 집에만 가두어 둔 채 세월을 보냈다. 현대 사회의 육아라는 것이 정말 힘든 것임에도 와이프는 어린이집과 유치원에 세준이를 맡기는 것을 포기하고 하루 24시간을 애와 2년 동안 붙어 지내느라 조금씩 성격이 괴팍해져 갔고 그 스트레스의 화살은 늘 나에게만 돌아오곤 했다.

나는 아무리 코로나가 유행이라 하더라도 친구들과 사회생활하는 법도 길러줘야 하고 그 나이 또래가 배워야 할 공부도 선생님에게 배워야 하는데 코로나가 무섭다고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상황에 이렇게 집에만 가둬둘 수 없다고 몇 번을 이야기했지만 그 말은 허공에 대고 외치는 말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그때 당시 내가 사랑하던 여인은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기분이었다. 그저 전염병의 공포에 벌벌 떨며 자신을 극단으로만 몰아가는 히스테릭한 여인과 함께 지내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나와 와이프는 한도 끝도 없이 멀어져 갔고 거의 그 상황이 극단으로 치닿았을 때 결국 우리는 극적으로 화해할 수 있었다.

우리는 끝없이 울고 서로의 감정과 상황에 대해 이야기하고 난 뒤 다시금 서로의 거리를 좁힐 수 있었고 현재 지금은 잘 지내고 있는 중이다.

재밌는 점은 우리 가족 전부가 코로나에 걸리고 난 뒤 우리 와이프는 이제 더 이상 어떤 유난도 부리지 않게 되었다. 오히려 한번 걸려서 마음이 편하다고 말할 지경까지 와버렸으니 말이다.


직업의 특성상 코로나라는 상황은 생계에 지장을 주지 않을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우리나라의 음악 시장의 생태 구조상 공연을 하지 못하면 가수와 레이블이 돈을 벌 수가 없고 돈을 벌지 못하면 자신의 홍보 수단인 뮤직비디오를 찍을 이유도 없어지는 탓이었다. 물론 이 와중에도 뮤직비디오를 찍을 뮤지션은 있었겠지만 확실히 일이 줄어버린 것은 사실이었다. 패션 필름부터 광고 바이럴까지 영상을 촬영하는 일에 광고주 모두가 소극적이 된 것은 사실이었고 코로나 이전보다 지금 내 일거리는 10/1로 떨어진 것도 사실이었다. 그건 꽤나 나를 좌절하게 만들었다.


누군가는 망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어디냐며 나를 위로했지만 참 그 말만큼 허망한 소리도 없는 노릇일 것이다.

코로나 때문에 일이 줄어든 내 불안증을 잠재울 수 있는 수단으로 나는 술을 선택했다. 사무실 지하 휴게실에서 나는 편안한 사람들과 매주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다. 나와 다른 사람들과 속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며 나는 참 얻은 것이 많았다. 내가 먹고살아야 한다는 핑계로 묻어놓고 살았던 영화를 만드는 꿈이라던지, 나도 모르게 경계하지 못하던 사이에 밑도 끝도 없는 꼰대가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던 일이라던지, 많은 사람들과의 대화 들은 많은 것들을 깨닫게 된 계기가 되어주었다. 술을 마시면서 타인과 속 깊은 대화를 나누었던 것들, 혹은 술을 마셔야만 떠오르는 속 깊은 상념 같은 것들이 그저 스쳐 지나가는 것이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그것들을 글로 남겨두기로 하였고 이렇게 에세이를 쓰고 있다.


인생이란 잃는 게 있으면 얻는 것도 있는 것인 법인가 보다. 이제 6-7월이면 마스크 의무 착용도 해제된다는 소식도 들려오는 것을 보면 이 지긋지긋한 코로나도 이제 끝을 향해 달려가는 것 같다. 만나서 지옥 같았고 두 번 다신 보지 말자!! 거지 같은 코로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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