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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승원 Sep 03. 2022

당신과 내가 닮았다는 게,

고 목수 이창현, 나의 외조부에 대한 기억을 긁어모아서

아버지는 좀처럼 집에 계시는 일이 드물었다.

아버지는 전국 팔도를 돌아다니며 고가구를 사 와서 수리하여 서울에 판매하는 일을 하셨기에 일주일에 하루 정도만 집에 계셨고 그 하루도 피곤함에 절어 그 누구와도 소통하고 싶어 하지 않으셨다.


우리 가족은 애초에 찢어지게 가난하여 그 점을 딱히 여기신 외할머니께서 내가 7살쯤 되었을 때 거두어주셨기에 우리 가족 일동은 그 이후 모두 외가댁에서 생활을 하게 되었다.


바쁘고 피곤한 아버지를 대신해 내게 아버지 비슷한 역할을 해주신 분은 나의 외조부셨다.

외조부께서는 아이를 예뻐하는 분이 아니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어떤 손주에게도 곰살맞은 분이 아니셨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제법 귀엽게 여기셨는지 제법 많은 추억을 함께 하려 하셨고 많은 이야기를 건네주려 하셨다.

이제 제법 나이를 먹은 나는 그 이유를 두 가지로 축약하여 추측할 수 있게 되었다.

그중 하나는 그냥 내가 한 집안에 사는 식구였기 때문이었을 테고 또 다른 하나는 내가 외조부와 너무나도 닮은 인간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외조부는 60, 70대에도 체격이 다부지고 까무잡잡한 피부에 박지환 배우를 닮은 분이었다.

그는 젊은 시절에 아주 솜씨 좋은 목수셨다. 커다란 집부터 가구까지 할아버지의 손이 닿으면 모든 것들이 뚝딱뚝딱 만들어지곤 했다.

그가 나무로 만든 가구는 너무나도 튼튼해서 지금도 어머니의 집에 가면 그 가구들은 30년이 지났음에도 일체의 망가짐이나 뒤틀림 조차 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할아버지는 내 손금을 봐주시겠다며 “너는 손이 딱 야무진 손이다. 너는 손재주로 먹고 살 팔자다. 너의 손금은 무언가 만들기 딱 좋게 선이 가있다.”라고 말씀하곤 하셨다.

외할아버지는 절대 손을 가만히 두는 법이 없으셨다. 외할아버지는 집안에 있는 모든 가구들을 직접 만드셨고 가구를 다 만들어 집안에 더이상 놓을 자리가 없어지면 젓가락 등을 이용하여 한옥집 모형 같은 것을 만들곤 하셨다. 그러고도 시간이 남으면 자신의 자전거를 모두 분해해서 하나하나 닦아서 다시 조립하곤 하셨다.

나 또한 그분을 닮아 좀처럼 손을 가만히 주질 못한다. 프라모델을 만들고 조립하거나 인테리어를 한다고 여기저기를 칠하고 뚝딱거리거나 자전거와 오토바이를 이리저리 고쳐대거나 튜닝하는 것을 좋아한다.

심지어 나는 머리가 막히고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을 때 뭐라도 만지작거리며 손을 움직여야만 머릿속이 서서히 정리되곤 한다.

손을 써서 무언가를 만든다는 행위만이 나라는 사람이 정의내릴 수 이유인 것마냥 하루 종일 손을 가만히 놀리지 못하는 날도 허다하다.

그건 나의 아들도 마찬가지인 부분이라 우리 아들도 유치원이 끝나고 돌아오면 점토나 색종이, 블록 등으로 하루 종일 뭔가를 만드는 걸로 온 시간을 보내곤 하는데 그걸 보고 우리 와이프도 징그러울 정도로 나와 닮았다고 말하곤 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건 나와 닮았다기보다는 나의 외조부를 닮았다고 말하는 것이 좀 더 맞을 것이다.


외조부는 매년 10월이 되면 연을 만들기 시작하셨다. 자신이 사용할 방패연과 내가 사용할 가오리 연을 하나씩 말이다. 할아버지께서 연을 만드는 모습은 꽤나 경건한 풍경이었다. 그 연은 문방구 등지에서 파는 그런 연과는 엄연히 다른 것이었다.

일자로 곧게 선 대나무를 엄선해서 골라와 가늘게 잘라 그것을 한참 다듬어 연살을 만들고 고급 한지에 풀을 먹여 단단하게 만든 다음 고급스럽고 아름다운 무늬를 잘라 붙이는 것만 몇 주가 걸리는 고단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왼쪽, 오른쪽의 형태와 무게가 완벽하게 평행해질 때까지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곤 하셨다. 어린 나는 그 모습이 무척이나 신기하여 멍하니 외조부께서 연을 만드시는 모습을 옆에서 바라보곤 하였다.

문방구에서 천 원이면 살 수 있는 연을 왜 그리 혼신의 힘을 다해 만드시는 건지 나는 딱히 궁금하지 않았다. 왜냐면 어린 마음에도 외조부의 마음을 왠지 알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었다.


할아버지께서 연을 만들면 그 연은 한참이나 우리 집 거실 벽 한가운데에 나란히 걸려 있었다. 나는 그 연을 빨리 날려보러 나갔으면 하는 바람이었지만 신정이 올 때까지 그건 어림없는 일이었다.

할아버지께선 연이 다 만들어진 그날 할아버지의 친구분들을 불러 한참이나 그 연을 자랑하곤 하셨다.

그날은 큰 외삼촌이 해외출장 때 사 오신 시바스리갈을 특별히 꺼내어 친구분들과 함께 나눠 드시며 그 연을 만들었다는 것이 얼마나 특별하고 대단한 일이었는지 한참의 시간을 들여 설명하곤 하셨다. 친구 분들도 이렇게 대단하고 정교한 연은 처음 본다며 감탄을 연발하였는데 그것이 정말 그 연이 대단한 물건이기 때문이었는지 시바스리갈 때문이었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신정이 되면 나는 외조부와 집 아래에 있는 조금 먼 거리의 고수부지까지 나가 연싸움을 하곤 했다. 할아버지는 방패연 그리고 나는 가오리연, 나는 그 연들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알기에 연의 실이 맞붙는 것이 달갑지 않아 요리저리 피하려 하였지만 외조부께서는 거칠게 밀어붙이곤 하셨다. 결국 줄이 끊어져 날아가는 건 늘 외조부의 방패연이었다. 할아버지께선 덧없이 날아가는 연을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한참이나 멍하니 바라보시다가 나에게 불같이 화를 내곤 하셨다. 왜 자꾸 요리저리 피해 다녀서는 저 귀한 방패연을 저리 날아가 버리게 하였냐고 말이다.

나는 외조부를 꽤나 두려워하였기에 죄송하다고 연신 말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아니 애초에 연 싸움을 안 했으면 될 일 아니었나.” 혹은 “아니 나는 연이 안 끊어졌으면 하는 마음에 피해 다녔을 뿐인데. 왜 내가 혼나야 하나.”하는 마음뿐이었다.


집안 어른들은 외조부께서 연싸움을 하는 이유가 집안의 악운을 멀리 내보내기 위함에 있다고 하셨다.

사실 나는 한해의 그 중요한 일을 함께 하기 위한 파트너로 외조부께 선택된 손주였던 것이다. 그 대단한 이 씨 집안의 장손을 제치고 말이다.


하지만 나는 외조부를 조금은 미워하고 두려워했다.

작은 외숙모가 데려온 샤크라는 개는 슬픈 숙명을 안고 우리 집으로 온 아이였다. 잡종에 얼룩덜룩한 무늬를 가진 복슬이였는데 우리 집에 온 사연은 이러하였다. 외숙모의 아버지께서 사돈이 개고기를 좋아한다고 하니 자신이 키우던 개를 잡아드시라고 보냈던 것이었다. 나는 그 당시 강아지 한 마리를 키워보는 것이 너무나 커다란 소원이었기에 사연이 어떠한들 샤크를 무척이나 귀여워하고 예뻐했다. 샤크도 마치 내가 주인인 것마냥 무척이나 따르기도 했고 말이다.

“내가 이렇게나 예뻐하고 좋아라 하면 외조부는 샤크를 안 잡아먹지 않을까?”하는 어림없고 깜찍한 발상도 조금은 있었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나 복날이 되자 샤크는 내 눈앞에서 할아버지와 그 친구 분들에게 말 그대로 복날에 개 패듯 두들겨 맞은 뒤 그대로 솥으로 들어가게 되었고 나는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아 1주일간을 식음을 전폐하고 방에 틀어박혀 울어댔다.

이렇게 될 줄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충격은 쉬이 가시지 않았다.

예뻐했던 샤크가 눈앞에서 죽도록 두들겨 맞은 뒤 솥에 고깃국이 되어 담겨져 있는 것은 감당하기 힘든 큰 슬픔이자 충격이었고 온 가족 누구도 나의 슬픔에 동조하지 않고 그저 귀한 개고기를 먹는 것에만 신나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도무지 슬픔과 울음이 멈추질 않았다. 나는 살면서 그렇게 서럽게 울어본 기억이 없다. 정말.

그리고 내가 그렇게 아끼는 개를 그렇게 눈앞에서 죽여버리시는 외조부를 바라보며 “나는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에게 소중한 존재가 아니었구나.” 하는 실망감과 서러움도 분명 그 폭풍 같은 감정 어딘가에 뒤섞여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아마 그날 분명 어딘가가 조금 망가졌을 텐데 그게 무엇인지 찾아내는 것은 좀처럼 쉽지가 않다.


외조부는 동네에서 일명 무서운 할아버지로 통하곤 하셨다. 동네에 쓰레기를 무단 투기하거나 미관상 좋지 못한 것을 동네에 늘어놓거나 고성방가 등으로 동네를 시끄럽게 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대로 곧장 찾아가 정말이지 끝장을 보곤 하였다. 기골이 장대하고 목소리가 우렁찬 할아버지가 사람들을 붙잡고 옳은 소리로 훈계를 해대기 시작하면 다들 기가 죽어 아무 말 못 하고 자신의 잘못을 시정하는 게 우리 동네의 암묵적인 룰이었다.

할아버지께서 서울을 뜨시고 십 년이 지나서도 종종 나이 든 동네의 어르신들은 나를 붙잡고 외조부가 계셨을 때 차라리 동네가 깨끗하고 조용해서 좋았다고 말하곤 하였다.

외할머니는 늘 동네 사람들과 치고 박고 다니는 외할아버지를 그닥 달갑지 않아 하셨지만 말이다.

외조부는 솜씨 좋은 목수였지만 그런 성향 탓에 늘 일을 맡긴 사람들과 싸워대기 일쑤라 제대로 돈을 받지 못하고 그만두거나 하는 일이 굉장히 잦으셨다고 어머니께선 종종 말씀하곤 하셨다.

이런 골치 아프고 슬픈 기질은 또 나에게 유전이 되어 나 또한 영상업을 할 때 종종 튀어나오곤 하는 부분인 것이 참 안타까울 따름이다.

나는 나의 그런 부분이 너무나 싫어 대부분의 상황을 둥글게 둥글게 이어나가 보려 노력하지만 유난히 멍청하거나 악독한 클라이언트를 만나 무언가 트리거가 당겨지면 “내가 두 번 다시 영상일을 안 받는 한이 있더라도 너한테 할 말은 다 해야 속이 시원하겠다.”

라는 식으로 돌변해버릴 때가 있다.

이런 것까지 유전이 되어버린다니 참 골치 아픈 부분이다.


외조부에게 최고의 프라이드는 자신이 어느 최고 일본인 목수에게 목수 일을 아주 제대로 배웠다는 것이었다. 그는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은 물건을 제대로 만들 줄 모른다. 하다 못해 손톱깎이조차 제대로 만들지 못한다.”라고 말하곤 하였다. 이런 식으로 외조부 손에 국산품이 들려지면 그게 무엇이든 늘 가차 없는 신랄한 평가가 이어지곤 했다. 일회용 젓가락부터 가위, 뺀치, 커터칼, 볼펜까지 그게 무엇이 되었든 말이다.

나는 학교에서 일본이 우리나라를 힘으로 지배하고 괴롭힌 나쁜 나라라고 배웠는데 집안에서는 일본이 뭘 해도 월등히 선진화되어 있고 뭘 만들어도 야무지고 섬세하게 만드는 민족이라고 배우니 내 머릿속은 무엇이 맞는 것인지 도통 뒤죽박죽이 되어버리곤 했었다.

지금은 그 사실이 둘 다 모두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나의 외조부에게 친일파 프레임을 씌우는 것은 너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는 그저 그들의 기술력에 순수하게 감탄했을 뿐이며 일본을 위해 일한 적도 없고  민족에게 폐가 되는 행위도 한 적 또한 없기 때문이다.


외조부에게 또 다른 프라이드는 장남인 큰 외삼촌의 존재였다. 큰 외삼촌은 가난한 목수의 집안에서 태어나 서울대 화학과를 장학생으로 들어가 대덕연구단지 소장을 역임하고 LG그룹 화학 부분 자회사의 사장까지 올라갔던 입지전적인 인물로 그야말로 개천에서 난 용,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분이었다.

외조부의 끝없이 올라간 어깨는 큰 외삼촌의 존재가 그 근거라고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덕분에 그는 노년을 아주 행복하고 풍족하게 보낼 수 있었다. 하고 싶은 모든 취미를 모두 즐기면서 말이다.


외조부의 가장 큰 취미 중 하나는 낚시였다. 외조부는 늘 함께 어울리는 친구분들과 낚시를 다니셨다. 낚시는 한 마리도 못 잡는 날도 많았지만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물고기를 많이 잡아오셔서 온 동네방네 다 나눠주고도 남아도는 바람에 생선 가게에 공짜로 가져가서 팔아달라고 부탁하는 날또한 잦았다.

그런 날에는 큰 외삼촌이 해외출장 때 사 오신 아껴두셨던 시바스 리갈을 한병 따서 친구 분들과 거나한 술자리를 가지곤 하셨다. “형님은 아들 잘 둬서 이런 술도 맨날 마시고 부러워 죽겠수.”라는 둥의 이야기를 안주 삼아서 말이다.

그런 날에는 온 집안에 생선 비린내와 양주 냄새가 가득 차서 정신이 혼미해지곤 했었다.


외조부는 낚시는 하고 싶은데 친구분들과 시간이 맞지 않으면 가까운 중랑천으로 나를 데리고 낚시를 가곤 하셨다. 나는 그 순간이 어린 생애에서 가장 지루한 순간이었지만 말이다. “나를 데리고 가서 낚시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고 내가 즐거워하는 것도 아닌데 왜 자꾸 나를 낚시에 데리고 가려하시는 걸까?” 어린 나에게는 늘 그게 무척이나 의문스러운 부분이었다. 하지만 이제 나는 왠지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그건 그냥 할아버지의 작은 로망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내가 아들과 단 둘이 캠핑을 가고 싶어 하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 아들은 그 말을 들으면 기겁할 이야기겠지만.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외조부의 또 다른 취미는 바로 금붕어 키우기였다. 내가 어렸을 때 당시만 하더라도 집 안에 가로 폭이 1M가 넘는 어항이 있다는 것은 정말 고급스런 취미였다고 알고 있다. 그 어항에는 금붕어 20마리 정도가 넓은 어항을 맘껏 헤엄치고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러다 금붕어 한 마리가 죽기라도 하는 날에는 할아버지는 내내 속상해하곤 하셨다. 어린 나는 낚시로 잡아서 먹는 물고기가 따로 있고 애지중지해야 할 물고기가 따로 있다는 게 다소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말년에는 사나운 진돗개 한 마리를 키우셨는데 그 녀석에게는 또 온갖 애정을 다해 기르시는 모습을 보고는 나는 “아니 저런 분이 어째서 샤크에겐…”이라고 생각이 들어 온통 분한 마음이 들기도 했었다.


외조부께서 돌아가셨을 때, 나는 딱히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지 않았다. 외할머니께서 돌아가셨을 때엔 그렇게 세상이 곧 무너질 것처럼 슬퍼하며 오열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말이다.

사실 나를 비롯해 모든 외가 식구들 전부가  마찬가지였다. 천수를 누리며 하고 싶은  다하고 가셨으니 호상이라는 의견이었다.

이제와 고백하자면 나는 다른 식구들과 달리 그가 미워서 그리 행동했던 것은 아니다. 나는 사실 어렸을 때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고 지금은 좀 더 명확하게 알고 있다.

외조부는 나라는 인간 안에 각인된 채 어떤 부분은 열화 되고 어떤 부분은 발전하여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고이 살아계시고 있으니 말이다.

다른 어른 분들이 돌아가신 것이 나라는 존재와 완벽한 이별을 고하는 것이라면 외조부의 죽음은 나에게 그런 의미에서 그렇게 조금은 다른 부분이 존재한다.


친구들과 술자리 하는 것을 좋아했고

늘 사람들이 주변에 모였고

자신의 손재주를 뽐내길 좋아했고

그 능력으로 가족을 부양했고

가능한 한 많은 취미를 가지려 했고

타인과 자주 시비를 붙어 골치 아파했고

좀 채 새치가 자라는 일이 없었고

공구를 좋아했고, 질서 있게 정리된 공간을 선호하였고 자신만의 정리 체계가 존재했으며

선문답같은 난해한 말들을 자주 던지셨던 점이

나와 참 많이 닮았지만은


누군가 나에게 정말 너가 외조부와 닮은 점은 무엇이냐고 묻거든 아마 이렇게 대답하지 않을까 싶다.


“외조부는 선한 분이 아니셨다. 그렇지만 외조부는 악한 분도 아니셨다.

외조부는 종종 타인에게 폐를 끼치는 분이셨다. 하지만 그만큼 타인에게 베푸는 것도 좋아하는 분이셨다.

마치 나처럼 말이다.”


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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