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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원 Nov 15. 2023

멍청한 마음씨름

일상 05



아버지와 앉아 이야기하다, 어쩔 수 없이 마주하게 된 눈부시게 밝은 형광등에서 퍼지는 빛무리를 괴로워했더니 묻는다. 안약을 넣지 않느냐고. 안약보다는 힘이 한 자락도 없어 휘청거리는 몸과 이질적이게 느껴지는 찬 공기들이 더 거슬렸는데도. 내게 필요한 건 의자와 쉬는 시간이었는데도.

정말 오래 앓았다. 벌써 세번째 코로나에 두번째 독감이다. 기어코 울증을 밀어내려 속이 답답할 때마다 피운 담배와 달고 있던 기관지염까지 더해져 모든 것이 결국 폐에 불을 질렀다. 폐렴이다. 숨을 쉴 때마다 기침이 나오고 가슴이 답답하다. 아, 이러다가 기침하다 죽겠다고 생각할 때 즈음 약을 한 번 먹으면 기침이 반절쯤 잦아든다. 가슴이 아파 인형을 끌어안지 않으면 기침을 할 때 된통 온 몸이 아프고, 누우면 눈물이 날 정도로 어깨가 꽉 눌리는 통증이 든다.

내가 꼭 하고 싶은 것을 하라고 하셨다. 지금의 공부는 잠깐이라고, 네가 원하는 것은 금방이라며. 배우는 것을 마다하지 않고 외려 답답함을 푸는 용도로 낭비하는 내게 그다지 옳은 말은 아니다. 나는 지금의 공부가 길게, 원하는 것도 길게 가져가고 싶었다. 빌 에반스의 The foolish heart를 들으며 그 말을 잠자코 곱씹어보는 날들이 늘었다. 꼭 그 곡이어야만 하는 이유는 딱히 없지만 그냥 그 곡을 들으면 캠퍼스 안의 어두운 기숙사 방에서 의자를 앞뒤로 흔들며 그 다음날 있을 수업을 준비하던 나, 빌 에반스의 음악이 끊기지 않도록 반복재생 해놓던 나의 실루엣이 기억과 시야 속으로 먹이 번지듯 퍼진다. 그 때의 나도 지금의 나도 갈래길에 서있기 때문일까.

문득 나는 누군가와 말씨름을 하거나 도망을 치고 싶거나 괴로울 때에는 말을 하면서도, 들으면서도 어떤 특정 공간을 자꾸만 생각해낸다는 것을 깨달았다. 예전부터 이 증상이 무엇인지 고민하던 차였는데, 예를 들어 이전의 약혼자와 말씨름을 할 때에는 꼭 뉴웨스트민스터 역의 지하에 있는 샤퍼스의 입구를 떠올렸고, 엄마와 입씨름을 할 때나 한국에 들어와 약혼자와 말씨름을 할 때에는 고등학교를 지나 고시촌의 입구에 있는 파리바게트 앞의 작은 정류장 따위를 떠올렸다. 그건 뭘까. 가만 생각해보면, 아주 잠시나마 내게 어떤 자유를 강하게 알려준 공간들인 것 같기도 하고. 도피를 하고 싶을 때면 도피처를 떠올리게 되기 마련이라, 고작 샤퍼스나 파리바게트 앞의 버스정류장 따위인 건 좀 억울해도 왜인지 나의 가설이 맞다는 강한 생각이 일어오른다. 나는 도망을 치고 싶을 때 어느 공간을 기억해낸다고. 마찬가지로 아주 괴로울 때 들었던 노래들은 아직도 잘 듣지 못한다. 트와이스의 음악들은 참 발랄하고 좋지만 여전히 티티를 듣지못한다. 그런 것들이다. 용어는 잘 모르겠지만 난 이걸 기억의 잔해에 긁혔다고 표현하곤 했다.


하루하루 나를 놓아버리는 느낌이 나. 어쩌면 도돌이표를 다진 나의 잘못일거다. 나를 너무 놔버리거나, 나를 너무 괴롭히거나, 나를 너무 얽매면 생겨버리는 늘 그런 흔한 감정의 질병이 도진거야. 도무지 얼마만큼 고삐를 잡고 놓을지 감이 오지 않는다. 생각이 더럽혀질 때마다 머릿속에서 종이비행기를 접어 고이 날려보내는 연습을 수십번, 그마저도 되지 않으면 구겨 쓰레기통에 버리는 연습을 수백번 했는데도 여전히 제자리 걸음일 뿐이야. 내 마음은 상처를 받은 것 같지 않은데, 꼭 내 머리가 상처를 받은 것 같다. 그러지 않고서야 고장이 나려고 해도 이런 식으로 고장이 나지는 않을텐데. 

요즘에는 그리움을 사그라뜨리는 방법을 잊어 많이 무너졌다. 저저번주부터, 대략 2주 전부터인가, 그랬던 것 같아. 그래서 한 번 무너지면 정말 속절없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다. 가끔씩은 좀 웃으면서 지내야 하는데 바깥에 나가지 않고 사람들과 좀처럼 또 만날 기회들을 계속 줄여가다보니 바싹 차리고 있던 정신줄이 의도치 않은 곳에서 부식되어가고 있는 듯하다. 하루에 세 번은 청소기를 돌리는데도. 꽃을 조금 꽂아둘까 고민중이다. 겨울에는 완전히 꽃을 못 볼테니까. 아버지 말론, 그 때에는 꼭 동백꽃 가지를 넣어놓자 하신다. 예쁠까. 괜히 누군가를 기억나게 하진 않을까 겁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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