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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원 Nov 15. 2023

모든 건 전부가 아니다

일상 07

드디어 바깥에 나왔다. 약간의 해방감, 약간의 지침. 출근하는 아버지와 함께 버스를 타고 짧지도 길지도 않은 시간. 시내로 나와 역에서 인사하고 나는 카페로, 아버지는 회사로 갔다. 그 동안 아주 많은 이야기를 나눴는데, 가장 굵직한 이야기는 나의 슬럼프와 내가 선택한 길에 대한 나의 반감이었다. 네가 선택했으니 그건 네 선택인거지. 하지만 슬럼프는 누구나 다 걸릴 수 있는거야. 그 말을 듣고 나는 고개를 기우뚱했다. 이해를 못했다거나 동의하지 못 한게 아니었다. 그저 그렇구나, 하고 내가 받아들이는 순간이었다.  


아버지는 나를 정말 잘 알고 있다. 동생이 있다고 해도 그에게는 내가 독녀. 날 어릴 때부터 옆구리에 끼고 키웠으니 비록 늘 같이 있지는 못했더라도 손바닥 안에 띄워놓는다. 내가 간헐적으로 하는 말이 있는데, "난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아." 다. 포기하지는 않더라도 쉽게 지치는 몰랑이 솜사탕 같은 나를 오랫동안 지켜보고 있다가 내가 그 말을 꺼낼 때 즈음, 입밖으로 아무 말이 나오지 않아도 귀신같이 알아차린다. 모든 게 다 완벽할 수는 없어... 너는 너무 완벽한 삶을 바라는 것 같아. 슬럼프는 누구나 다 걸려. 어쩌면 마법같은 말이다가도, 어쩌면 내 마음을 몰라주는 나쁜 말이다가도, 아무튼 종잡을 수 없는 그만의 주문이다. 수렁에 빠져있는 나를 기어코 끌어올려 앉혀놓는 그런 주문. 


어렸을 때부터 나는 모든 일에 위기의식을 느끼고 살아 마음이 급했다. 완벽주의 성향은 일곱살 때부터, 친구들이 생기기 시작하고 누군가에게 칭찬을 듣기만 하는 나이가 되었을 때였을 것이다. 다른 애들보다 어른스러워야 하고, 늘 무언가를 이해해주어야만 하는 위치에 있던 나. 엄마나 아빠가 약속한 날 나를 데리러 오지 못 해도 그렇구나, 그들이 나와 한 약속을 지키지 못 해 그걸 무마하려고 외려 떼를 쓰는 모습을 보고 그렇구나, 해야만 했던 나는 언젠가부터 내가 똑똑하다는 말을 듣는 것에 집착을 했다. 아버지가 오랜만에 나를 보러 와서 책을 잔뜩 사주면 그 책을 앉은 자리에서 몇 번이고 읽어 내용을 달달 외우고 그걸 아버지에게 말해주는 걸 좋아했다. 어른스러운 대화, 지식이 요구되는 대화는 아빠 말고는 통하는 사람이 없었으니 늘 그렇게 신이 났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칭찬에 인색했다. 지금 와서 늘 말하는 걸 들어보면 내가 자만에 빠질까봐 걱정스러웠고 좀 더 독립적인 아이가 되길 원해 그랬다는데, 별로 좋은 방법은 아니었던 것 같아. 아버지 외 모든 사람이 나를 칭찬했어도 아버지는 입을 굳게 다물고 간혹 내게 머리아픈 질문을 했다. 아주 복잡한 지혜의 고리를 풀어야 하는 기분으로 그 질문을 풀다보면, 나는 아직 부족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아. 완벽주의가 병질이 된 것은 그때부터, 그 이후로 나는 내가 완벽해야 했고, 주변 어른들은 그런 나를 완벽해야 한다는 어떤 조그마한 편견에 집어넣어 압박했다.  


그러나 아직 그리운 그 사람이 일기에 남겼던 한 문장이 아직 머릿속에 남아 맴돈다. 당신은 완벽하지 않아. 그래도 괜찮아. 그 말이 사실 제법 내게 위안이 되었다는 걸 꼭 말해주고 싶었어. 사실 나는 정말로 완벽하지 않기에 인간적인 존재로 살아남는 것일텐데, 그저 욕심에 시달리는 것뿐이다. 뭐든 완벽한 상태여야 이 세상에서 완벽하게 살아남을 수 있다는 집착도 한 몫 하겠지. 친구들이든, 가족들이든 이제 내 강박에는 혀를 내두르는 것 같지만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슬슬 강박에 취해있는 나를 구덩이에서 집어올려 햇볕 좋은 곳에 말려놓아야겠다는 생각 뿐이다. 가끔은 하지 않아도, 가끔은 하지 못해도 괜찮다고. 그냥 그렇게 생각해야 할 때가 왔다. 


스물 아홉인 아버지는 나를 낳았지만 스물 아홉인 나는 낳은 것 없이 나를 아직 다듬고 있다는 말에 아버지가 웃었다. 널 낳았을 때 나도 착잡했어. 아는 것도 없고, 할 줄 아는 것도 없고, 해놓은 것이라곤 널 낳아놓은 게 전부였는데 그 때의 나와 지금의 네가 다를 게 뭐냐면서. 세상이 너무 빠르게 변화하고 사람들이 지쳐가는 속도는 그 변화보다도 빠른 이 시대에 네가 할 수 있는건 그저 너를 담담히 가꾸고 다져가는 것뿐이라는 말. 그 말이 정말 고마웠다. 내가 이렇게 죽을 쑤며 무언가를 준비하기에만 급급한 모습에도 나를 묵묵히 응원해주겠다는 말처럼 느껴졌거든. 아무것도 이루어놓지 않아도 괜찮아. 사람은 누구나 다 기회를 놓치는 실수를 하지만, 그 이후에도 언제고 새로운 기회는 다가와. 아주 사랑하는 사람을 놓쳤던 날 울며 사랑도 공부도 일도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없다 오열하는 내 어깨를 두드려주던 손이 생각난다. 모든 건 전부가 아니다. 작은 조각들이 서로 부딪혀가며 만들어지는 틀 없는 지그소 퍼즐일 뿐. 그 퍼즐이 모두 완성되어도 새로운 퍼즐 조각은 계속 생겨난다. 


명심해, 언제고 행복할 수는 없고 모두가 행복해지는 드라마 같은 일은 앞으로도 영원히 없을테지만 그 사이에서도 아스팔트 틈새로 자란 억센 풀들 같은 끈기와 소소한 이룸들이 결국 행복이 된다는 사실을.  


마음 아플 일 없이 행복하자. 삶이 그대를 버렸다 느껴지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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