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현관 비밀번호가 노출됐다.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 이런 상황에서, 상관없어, 그 사람이 한 번 들은 번호를 기억하겠어? 기억한다고 해도 뭐 하러 남의 집에 관심을 가질까, 아무리 세상에 믿을 사람 없다고 해도 무턱대고 불신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아, 신문이나 뉴스에 나오는 사건 사고는 너무 불신사회를 조장하는 것 같아, 하며, 태연자약할 사람이 몇이나 될까.
비밀번호는 우리 집에 음식을 배달한 사람에게 노출되었다. 처음에는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그 바쁜 사람이 한 번 노출된 번호를 기억할 리 없다는 믿음에서.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이상스레 기분이 말끔하진 않았다. 언젠가 들었던 뉴스 때문일 거다. 물론 모든 사람을 잠재적 범죄자로 보는 건 절대 아니다. 오해 마시길. 그러나 불특정 다수가 익명의 상태로 살아가는 도시생활에서 조심해야 할 일임에는 틀림없다.
비밀번호가 노출된 일의 전말은 이러하다. 내가 코로나로 격리 중일 때, 딸이 집으로 음식을 배달시켰다. 음식을 가지고 온 사람이 아무리 공동현관문에서 방문 초인종을 눌러도 열어주지 않으니 딸에게 전화를 했고, 딸은 비번을 알려준 거였다. 초인종 소리가 나지 않도록 꺼놓은 상태였고, 나는 또 마침 통화 중이었다. 전화를 받지 않으니까 배달원이 음식을 주문한 딸에게 전화를 했단다. 딸은 아무 생각 없이 비밀번호를 알려주었단다.
조심성 없이 왜 그랬느냐는 내 말에, 배달하는 분들이 얼마나 바쁜데, 그럼 마냥 기다리게 해요? 또 비밀번호를 기억하시겠어요? 딸은 오히려 내게 예민하게 군단다. 다 좋다. 나도 꼭 외부사람을 불신해서 그런 건 아니다. 아무리 그래도 최소한 사적인 공간을 보호하고 경계해야 하는 건 맞지 않는가. 딸은 그렇게 신경 쓰이면 비밀번호 바꾸란다.
솔직히 바꾸고 싶지 않았다. 익숙하다 못해 그냥 손이 저절로 가는 비밀번호인데, 바꾸면 아무래도 불편할 것 같았다. 젊었을 때는 이메일 비밀번호를 수시로 바꾸고, 몇 개의 메일 비밀번호도 모두 다르게 설정해놓았다. 그뿐인가. 카드와 통장 계좌 비밀번호도 다 다르게 해놓았다. 그것도 익숙하지 않은 숫자와 특수문자를 조합하여. 그래도 혼동 없이 잘 기억해 사용했는데, 언젠가부터 그게 번거로워졌다. 그래서 이제 웬만한 것들은 비밀번호를 통일해놓았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바꾸기로 했다. 아들 생일로 할까, 딸 생일로 할까, 아니 내 집인데, 집에 잘 오지도 않는 애들과 관계된 걸로 할 필요 없다. 옛날 차번호로 할까 했는데, 지금 타고 있는 ‘프린’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어 그것도 안 되겠다 싶었다. 비밀번호 바꾸는 것도 이렇게 고민을 하니, 나는 본질적으로 고민이 많은 사람 아닌가 싶다. 결국 아무도 생각해내지 못할 번호로 정했다. 애들에게도 안 가르쳐줄 생각이다. 이 무슨 심보인지 모르겠다.
처음 해보는 비밀번호 바꾸기, 쉽지 않았다. 키 뚜껑에 쓰여 있는 비밀번호 바꾸는 방법 내용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나름대로 이해해 실행해도 안 되었다. 내가 기계치는 아닌데, 또 문장 이해도가 낮은 게 절대 아닌데 왜 안 될까. 할 수 없이 서비스센터에 전화해서 바꾸는 방법을 알아냈다. 설명을 들으며 메모한 것을 바탕으로 설명서를 보니, 내용에 빠진 부분이 있었다. 그래서 안 되었던 것이다.
남들은 어떻게 그렇게 척척 잘 바꿀까. 딸에게 전화로 말했더니 사위는 그런 거 읽어보지 않고도 잘만 한단다. 엄마는 왜 쉬운 걸 어렵게 풀려고 그러냐며, 학문적 시각 말고 직관적으로 보란다. 그래, 네 신랑 잘 났다. 뚝. 전화를 끊었다. 문제를 발생시켜 놓고 오히려 내게 타박하는 것 같아, 기분이 언짢았다. 엄마 저 때문에 고생했어요. 왜 제품설명서를 그렇게밖에 못 쓸까라고 내 편에서 말해주면 어디 덧나나. 비밀번호가 모녀 사이 이간질한 격이 되고 말았다.
우여곡절 끝에 비밀번호를 바꾸었다. 누구도 유추할 수 없는 아주 어려운 걸로. 앗! 오늘도 실수다. 띠리리 띠리리리 불협화음이 나면서 문이 열리지 않았다. 새롭게 입력한 숫자를 다시 누른다. 뜨루루 샤악. 열린다. 알리바바가 열려라! 참깨! 외쳤을 때 이런 효과음이 나면서 열렸을까. 아마 그냥 척! 열렸을 것 같다.
전에 쓰던 비밀번호는 십여 년 전부터 쓰던 거다. 번호 키 앞에만 서면 자동적으로 눌러진다. 머리보다 손가락이 더 먼저 기억하는 것만 같다. 뇌에서 내리는 명령에 의해 모든 동작을 하는 거라고 누가 말했나. 그만큼 자동으로 눌러지는 비밀번호다. 익숙해진다는 건 그런 것이리라.
외출에서 돌아와 현관 앞에 서면 자동으로 번호 키에 손이 간다. 그리고 또 자동으로 전에 사용하던 비밀번호를 누른다. 이상한 노릇이다. 타성에 젖는다는 게 이런 걸까.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누르니 말이다. 그럴 때마다 중얼댄다. 으이구, 왜 쓸데없이 비밀번호를 노출시켜서. 요즘 딸의 귀가 간지러울 것 같다. 내 불평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