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 같은 하루

일상

by 최명숙


송년모임이 있는 날이다. 꼭 참석해달라는 부탁이 있어 가기로 했다. 밖은 뿌옇게 흐렸다. 경기 서부 쪽에 함박눈이 펑펑 내리고 있단다. 이곳에도 금세 눈이 내릴 것 같다. 몇 번이나 일기예보를 검색해보았다. 오후 3시부터 눈이 내릴 것으로 예보돼 있다. 오후 5시 모임 시간에 맞추려면 1시간 전쯤 집에서 나서야 한다. 창밖을 다시 내다보았다. 뿌연 기운이 걷히고 하늘이 오히려 밝아졌다.


자동차를 갖고 갈까 두고 갈까 고민했다. 눈 올 것을 예상하니 운전이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로 결정. 조금 일찍 출발했다. 그런데 하늘이 심상치 않다. 다시 또 먹구름이 덮이기 시작했고, 온 천지는 뿌옇게 흐려진다. 차를 놓고 온 것은 잘한 일이다. 무척.


버스에 올라타자마자 떠오르는 생각. 앗! 우산 들고 나온다는 걸 깜빡했다. 다시 집에 갔다 오면 약속시간에 늦을 것 같다. 또 날씨 검색. 눈이나 비가 올 시각은 목적지와 집에 가고 올 시간을 비켜 있다. 다행이다. 그런데 버스에서 지하철로 갈아탈 때, 눈발이 약간 날렸다. 눈 내리는 풍경은 언제나 낭만적이다. 하늘을 보았다. 많이 올 것 같지 않다.


지하철에서 내려 출구로 나오자 세상은 달라져 있었다. 펑, 펑, 펑. 함박눈이 소담하게 내린다. 도로에 눈이 쌓였다. 어찌나 눈이 많이 내리는지, 감히 밖으로 나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한참 눈 내리는 풍경만 무연히 보고 있었다. 우산을 가진 사람들은 거리로 나서고, 나처럼 우산이 없는 사람 몇은 내리는 눈만 쳐다본다. 함박눈은 멈출 기색이 없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펑펑 내린다.


송년회에 늦을 것 같다. 사적인 모임이 아니니 신경 쓰인다. 안 되겠다. 이제 나서야 한다. 우산 파는 곳이 눈에 띄지 않는다. 할 수없이 머플러로 머리와 목을 감쌌다. 모처럼 머리 손질까지 하고 나왔는데, 눈을 맞으면 낭패기 때문이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내리는 눈. 금세 눈사람이 되고 말았다. 우산을 들고 나오지 않은 걸 얼마나 후회했는지.


그때였다. "자, 받아요, 이거 쓰고 가시라고요." 어떤 남자가 내게 우산을 내밀었다. 깜짝 놀라 뒷걸음질 치며 물러섰다. "이 우산 쓰세요." 남자가 재차 내민다. 휘몰아치는 눈발 때문에 간신히 고개를 들어 남자를 보았다. 두꺼운 패딩 코트를 입고 모자까지 꾹 눌러썼다. 알이 큰 안경까지. 여전히 머뭇댔다. "집에 다 왔거든요. 그러니 쓰시라고요." 우산을 받았다. "아, 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꾸벅꾸벅 인사를 하고.


구세주가 따로 없다. 예수님이 어디 계시다 딱한 내 처지를 보고 나타난 것 같다. 아니, 내 수호천사인가. 남자가 사라진 곳을 보았다. 없다. 내 손에는 우산이 들려 있는데. 몽환적이면서도 환상적이다.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을까. 집에 다 왔다고 했는데, 사람이 살만한 주택은 눈에 띄지 않았다. 그 남자는 분명히 천사였다.


버스정류장에서 머플러를 풀어 눈을 털었다. 머리는 머플러를 썼어도 다 젖었다. 외투 깃과 어깨, 심지어 부츠 목까지 온통 눈으로 덮였다. 정류장에 서있던 아주머니가 내 머플러로 등 뒤까지 눈을 털어주었다. 나도 그 아주머니의 옷에 들러붙은 눈을 털었다. 참 눈이 많이 오네요. 아주머니가 웅얼대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정류장 뒤에서 고소한 냄새가 솔솔 났다. 붕어빵을 굽고 있다. 눈은 펑펑 내리고, 사람들은 드문드문 오가고, 붕어빵 익어가는 맛난 냄새는 나고. 상상 속에 있던 겨울 정취가 갑자기 나를 에워쌌다.


송년회 장소에 5분 전쯤 도착했다. 지정된 좌석에 앉자 박 선생님이 반긴다. 우산을 보더니 선견지명이 있단다. 우산이 내 손에 들어온 경위를 이야기했다. 어머! 그 남자 멋지네요. 박 선생님이 너스레를 떤다. 내가 생각해도 멋진 사람이다. 몇 발자국만 걸어도 눈사람이 될 정도인데, 선뜻 우산을 건네주다니. 더구나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송년회가 시작되고 1년 동안 그 기관에 헌신한 사람들에게 상장이 수여되었다. 깜짝이야! 꿈에도 생각지 않았는데, 내 이름이 불렸다. 내가 무슨 일을 했다고 상을. 뜬금없다는 생각과 잘못 들었다는 판단을 동시에 할 때, 옆의 박 선생님이 나를 떠밀었다. 앞으로 나가면서도 얼떨떨했다. 담당자가 꼭 참석하라고 강조한 이유를 그때서야 알았다. 그렇게 얼 띤 구석이 있는 나다.


좋은 일도 쌍둥이로 오는 걸까. 우산에, 상에, 연달아 이렇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인가. 우산은 전조증상이었던 걸까. 같은 테이블에 앉은 분들의 축하를 받고, 상장이 손에 있는데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 언젠가 동료 교수가 내게 상복이 많다고 했었다. 그때는 흘려들었는데, 가만 보면 맞는 말이다. 별로 대단한 일을 한 것도 없는데 상을 자주 받는 편이니, 그저 감사할 뿐이다.


집으로 돌아올 때는 눈이 그쳤고 거의 녹았다. 다시 지하철을 타고 오면서 오늘 저녁 두세 시간 동안에 일어난 일이 꿈속처럼 생각되었다. 우산과 상장이 옆에 있는데도. 이렇듯 가끔 뜬금없는 일이 일어나는 게 인생이기도 하다. 그러니 사는 재미도 있는 것이리라. 예측할 수 없으니까. 모두 다 알고 살면 무슨 재미겠는가. 오늘은 참으로, 선물 같은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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