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거나 말거나

일상

by 최명숙


이 글을 읽기 전에 경고합니다. 절대 비웃으면 안 됩니다. 설마 하며 의심해도 안 됩니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말 들어봤잖아요. 지인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줬더니 곧이듣지 않더라고요. 비웃기도 했어요. 그래서 경고하는 겁니다. 여러분도 안 믿어주신다면 난 화낼 거예요. 그럼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얼마 전 일이에요. 오후 햇살이 있을 때 산책을 하고 아파트 단지로 들어왔어요. 아직 해는 조금 남아 있었죠. 초등학교 3~4학년쯤으로 보이는 키 작은아이와 키 큰아이 둘이 배드민턴장에서 운동을 하고 있지 뭐예요. 나는 아이들이 운동하는 것만 보면, 같이 하고 싶어 안달이 나요. 그게 참 이상하죠? 그래서 다가갔어요. 잠시 보고 있었죠. 그런데 작은아이가 배드민턴을 아주 못 치는 거예요. 서브도 못 받더라니까요. 큰아이가 약간 짜증을 냈어요. 아, 쫌 잘 받아봐, 라며. 작은아이는 히힛 웃었지만 미안한 빛이 역력했어요. 이때다 싶어 내가 끼어들었어요.


“얘들아, 나 좀 시켜줄래?”

작은아이가 얼른 라켓을 나에게 주었어요.


나는 신이 나서 코트로 뛰어 들어갔죠. 하지만 생각대로 잘되지 않았어요. 실은 나도 라켓을 40년 만에 들어보는 거였거든요. 실제로 배드민턴을 쳐본 적이 까마득했어요. 마음과 달리 공이 맞지 않았어요. 작은아이는 한쪽에서 안타까운 듯 보고 있었어요.


“나 그만할래. 잘 안 되는 걸.”

슬그머니 라켓을 작은아이에게 넘기려는데 큰아이가 소리쳤어요.


“누나! 다시 해보세요.”

깜짝 놀랐어요. 나에게 누나라고 해서 말이죠. 점퍼를 입었고, 마스크를 하고, 모자를 썼다고 해도, 내가 누나로 보이다니요. 그러나 놀라는 모습을 보이기 싫었어요. 큰아이 눈에는 내가 누나로 보였으니까 그렇게 부른 것 아니겠어요?


“아니야, 나 그만할래애.”

작은아이에게 라켓을 주면서 애교스럽게 말했죠. 그때 작은아이가 다시 말했어요.


“누나, 처음부터 누가 잘해요? 조금 더 해보세요.”

나는 다시 용기를 내서 더 하기로 했어요. 누나니까요. 할머니가 아니고, 아줌마도 아니고 말이죠. 아이들 눈은 정확하잖아요.목소리를 더 청아하게 다듬어서 말했어요.


“어머! 그으래? 너희들 참 착하구나아. 고마워어. 그럼 더 해볼게에.”

다시 코트로 뛰어가 신나게 배드민턴 라켓을 휘둘렀어요. 옛날 실력이 다시 나오기 시작하지 뭐예요. 큰아이가 좋아서 입이 벙시레 벌어졌어요. 한참 땀이 줄줄 흐를 정도로 운동을 함께 했어요. 작은아이도 3대 2, 4대 5, 스코어를 외치면서 덩달아 즐거워했어요. 작은아이가 심판을 봤거든요. 우리 셋은 해가 꼴깍 넘어가고 어둠이 밀려올 때까지 재밌게 배드민턴을 쳤어요.


“얘들아, 나 그만할래. 오늘 함께 놀아서 즐거웠어. 다음에 또 놀자.”

라켓을 작은아이에게 넘겨주며 말했어요.


“앗! 우리 다음에는 같이 못 놀아요, 누나!”

작은아이가 말하는 거예요.


“으응, 왜애?”

“저 애는 광주로 이사 가고요, 저는 하남으로 이사 가요.”

“어머! 그럼 어떡하니? 우리 오늘 처음 만났는데 바로 이별해야 해? 섭섭해서 어쩌지?”

나는 솔직히 너무 서운했어요. 잠시 놀았지만 나에게 누나, 누나, 하며 살갑게 따라주는 아이들이 무척 귀엽고 금세 정이 들었거든요. 그리고 초등학생에게 누나 소리 듣기 어디 쉬워요? 나니까 되는 거예요. 애들이 얼마나 잘 알아보는데요. 할머닌지, 아줌만지, 누난지 말이에요.


두 아이를 데리고 아파트 단지에 있는 편의점으로 갔어요. 음료수든 뭐든 고르라고 했지요. 아이들과 나는 음료수를 하나씩 들고 짠 부딪쳤어요. 이사 가서도 공부 열심히 하기, 친구들 잘 사귀기, 큰아이와 작은아이 둘은 평생 친구 하기, 가끔 이 누나 생각도 해주기. 그렇게 우리는 약속하고 음료수를 마셨어요. 헤어질 때 아이들이 누나 잘 지내세요, 라며 서운해했어요. 우리는 오랜 친구 같았어요. 믿어지지 않는다고요? 정말이라니까요.


집에 와서 얼른 욕실로 들어가 거울을 봤어요. 거울 속에는 여고생이 있었어요. 거울을 보고 가만히 불러보았어요. 누나, 누나. 미소가 지어졌어요. 두 아이의 천진스러운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렸답니다. 공연히 눈물이 찔끔 났어요. 누나였던 옛날이 생각나서인지, 아이들이 사귀자마자 이사 간다고 그래서인지 모르겠어요. 생각해보면 아이들이 이사 가는 게 또 얼마나 다행이에요? 내가 누나가 아니라는 게 탄로 나는 건 시간문제일 테니까요. 그 아이들에게 나는 배드민턴 같이 친 누나, 음료수 사준 누나로 기억되고 싶거든요.


몇몇 지인에게 이 이야기를 신이 나서 들려주었거든요. 헛웃음만 웃고 믿으려 들지 않아요. 어떤 사람은 내게 병원에 한 번 가보는 건 어떠냐고 해서 등짝을 패 버렸어요. 또 어떤 사람은 그 애들 어두워서 잘 몰라봤나 보라는 거예요. 무슨 소릴! 해가 남아 있었다니까, 소리를 쳤더니 요새 아이들은 그냥 여자를 다 누나라고 하나? 그러더라고요. 안 믿는 거예요. 여러분도 그래요? 믿거나 말거나 사실은 사실이니까요. 힛, 생각만 해도 기분 좋은 이야깁니다. 나의 썰은 여기서 접을게요. 믿거나 말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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