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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명숙 Dec 24. 2022

딸을 빼앗겼다

그래도 행복하다

 


딸을 빼앗겼다. 이 명제가 맞을까. 엄밀하게 볼 때 빼앗긴 것은 아니니까. 딸 스스로 간 거니까. 그래도 빼앗겼다고 표현하는 것은,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한 자기 연민, 뭐 그런 것 같다. 아무튼. 빼앗겼다는 사실이 요즘 더 명징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렇다고 다시 빼앗아 오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다. 그럴 수도 없고. 


딸은 ‘쿨’한 성격이다. ‘쿨’이라는 어휘를 대신할 우리말이 적절치 않아 그냥 쓴다. 딸은 누구에게든 마음을 쏟거나 기대는 법이 없다. 내게는 더욱 그랬다. 어릴 적에도 손이라도 잡을라치면 스윽 빼버려 아직까지 정식으로 손을 잡아본 적 없다. 안아주려고 하면 밀어낸다. 딸의 침대에 같이 누우면, 나를 굴려서라도 밀어냈다. 초등학생은 힘이 세다. 내가 약간 정겹게 굴면, 왜 그래? 하던 대로 하시지, 한다. 그럼 내가 자초한 것인가. 하긴 인간사 자초하지 않는 게 있던가. 모든 문제가 자기로부터 생겨나는 것이거늘. 


요즘 딸이 마음 쏟는 대상이 생겼다. 딸이 낳은 아들 둘. 자기 아이들에게는 더할 수 없이 마음을 쏟는다. 온통 그 아이들밖에 뵈는 게 없는가 보다. 육아 도와달라고 불러서 가면, 솔직히 나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는다. 자기 아이들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내게는 다 건성이다. 아이들 돌보느라 그러는 거니까 이해는 하지만 어느 땐 슬그머니 섭섭해지기도 한다. 생각지 못할 정도로, 육아, 직장생활, 살림을 잘하고 있으니 그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마음을 달랜다. 사위에게도 그만하면 헌신적이다. 오직 내게만 ‘쿨’하다. 


그 힘든 작곡 전공하여 대학원에서 음악교육을 공부해 놓고, 대학교 행정직에 있는 게 내 성에는 안 찬다. 그런 내 마음을 눈치챈 딸은, 요즘 교사 예전과 달라 너무 힘들단다. 자기는 교직원이 좋단다. “너 공부시키느라 들어간 레슨비와 학비가 집 한 채도 넘는데, 내 소망을 못 이뤄주니?” 내가 가끔 투정을 부린다. “자식을 통해 자기 만족하려는 사람이 제일 어리석어요.” 딸은 숫제 나를 어리석은 사람 취급이다. 


그래도 눈치 하나는 빨라 내가 원함직한 것은 재빨리 사서 쿠*으로 보낸다. 말을 꺼내기 겁난다. 또 사서 보낼까 봐. 뭐가 좋더라 하거나, 뭐가 어떠니 하면, 즉각 보낸다. 그건 아들도 마찬가지지만 딸이 더 빠르다. 그걸 내게 대한 관심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으나, 딱히 그렇지는 않다. 저를 키우고 가르친 부모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일 거다. 그 외에는 하는 게 별로 없으니까. 내가 원하는 건, 사는 이야기 시시콜콜, 심지어 시댁이야기도 어미에게 다 해주는 건데, 절대 안 한다. 이제 기대하지 않는다. 그럴 딸이 아니니까. 


지금까지, 고민이나 친구들 관계에서 생기는 일을, 내게 말한 적이 거의 없다. 꼭 필요한 것 아니면 안 한다. 생긴 건 키도 작고 오목조목 아기처럼 생긴 앤데, 행동은 스케일이 크다. 어느 일에는 나보다 더 배짱이 두둑하고 흔들리지 않는다.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 애가 그러니까 적응이 안 될 때 간혹 있다. 


결혼하기 전에 딸은 내 상담자였다. 무슨 고민이든 다 말했다. 생각해보면 답은 언제나 하나였다. “남 생각 그만하고 엄마의 길을 가요. 하고 싶은 대로 하셔.” 별로 대단한 답이 아니었는데, 그때는 아주 명답인 줄 착각했고 딸을 인정했다. 가만히 보면 내가 기댔던 거다. 그러던 딸을 결혼과 동시에 빼앗겼다. 사부인께. 이 글을 사부인께서 읽으시면 큰일이니까 비밀! 쉿!


얼마 전 딸이 모처럼 전화했다. 아주 들뜬 목소리였다. 기분 좋은 일 있느냐니까 시댁에 간단다. 시댁 가는 게 그렇게 좋은가 보다. 

“그렇게 좋아?” 

“응. 우리 어머님 무척 좋아. 아버님도.”

“왜?”

“왜라니, 잘해주셔. 재밌고.”

잘해주고 재밌다니, 그럼 사돈들께서 어떻게 해주시기에 잘하고 재미있다는 건지 원. 업어주시나, 노래하고 춤이라도 추시나, 개그를 하시나.

“어떻게 잘해주시는데?”

“아, 쫌! 엄마랑은 차원이 달라.”

“어떻게?”

“말꼬리 잡고 늘어지지 마. 지금 바빠. 아범이 애들 데리고 내려가네. 나도 가야 해. 끊어.”

“근데 너! 아까부터 왜 계속 반말이야!”

어라, 내 말도 끝나기 전에 전화를 끊었다. 이렇게 완벽하게 딸을 빼앗겼다, 사부인께. 


사부인은 자식이라곤 오직 하나, 아들뿐이다. 그 아들과 결혼한 우리 딸, 내게 못 받았던 사랑과 관심을 오롯이 혼자 다 받는 것 같다. 딸이 없다가 딸 같은 며느리 생기니 좋으신가 보다. 그래도 며느리는 며느리인데, 우리 딸에게 하시는 것 보면, 걱정이 앞선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 같아서. 


나는 딸을 기꺼이 사부인께 빼앗기기로 마음먹었다. 안 되는 건 잡고 있을 필요 없다. 포기하는 것도 능력이다. 시부모님께 잘해라, 세상에 그런 분들 안 계시다. 애들이 다 보고 배운다. 시부모님이 먼저니까 내 걱정은 하지 마라. 딸에게 늘 귀에 딱지가 앉도록 하는 말이다. “아, 걱정 마셔. 엄마 걱정을 내가 왜 해? 알아서 잘 사는 분을.” 그럼 뭐 사돈들은 알아서 잘 안 사시나? 매정한 것! 입에서 튀어나오려는 걸 절제한다. 교양 있게. 그러고 보니, 빼앗긴 게 아니라 철저하게 시댁으로 가버린 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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