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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명숙 Jan 03. 2023

성죽재흉, 글쓰기의 진정한 매력

완성된 글이 되려면

   

성죽재흉(成竹在胸), 내가 글을 쓸 때 염두에 두는 것이다. 직역하면, 다 자란 대나무가 가슴속에 있다는 것으로, 글을 쓰기 전에 완전하게 구상한다는 의미이다. 오래전 소동파의 산문을 읽다 알게 되었다. 북송의 문인화가 문동이라는 사람은, 다 자란 대나무가 가슴에 있기 때문에, 붓을 들어 그리기 시작하면 그야말로 일필휘지로 그렸다는 걸. 그 이야기에서 유래한 사자성어가 성죽재흉이다.  


소동파의 친구 문동의 이야기는 인상적이었다. 글쓰기에 적용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글을 그렇게 쓰고 싶었다. 서두, 본문, 말미 또는 기승전결이 가슴에 있어 컴퓨터 자판에 손을 얹기만 하면, 끝까지 한 번에 쓸 수 있기를 바랐다. 구상하고 또 구상했다. 어떻게 시작하고, 무슨  내용을 담을 것이며, 의미화 내지 주제를 어떻게 드러낼 것인지. 


아주 가끔 그분, 글쟁이들이 흔히 말하는 그분이 오실 때도 있다. 그러면 수필 한 편을 1시간 이내로 쓸 수 있다. 또 단편소설 한 편을 이틀에 완성한 날도 있다. 그것도 아주 괜찮은. 드문 일이었지만. 쏟아지는 서사 묘사 설명 논증을 자판으로 미처 다 치지 못해, 느린 타자 속도를 원망할 지경이었다. 내가 대문호가 될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이 얼마나 황당무계한 일인가. 그런 경험이 한 번이라도 있는 사람은 절대 놓지 못할 것이다. 글쓰기를. 그것이 글쓰기의 매력이다. 


전업 작가로 살까 말까 고민하는 것도 그즈음이다. 꿈인 듯 취해 있다 현실로 돌아오면, 스스로 부끄러워 몸을 움츠리게 되지만 작가에게 그런 경험이 있어야 한다. 어디든 미쳐야 미칠 수 있는 것이므로. 자기만의 특별한 경험은, 미치는데, 다다르는데,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글쓰기도 몰입해야 다다를 수 있는 경지가 있으니까. 거기까지 가기엔 긴 시간이 필요하다. 그것의 구체적인 방법은 다음 기회에 쓰기로 한다. 이 글에서는 성죽재흉만 이야기하고. 


냉철하게 생각해 보면 그분이 오신 게 아니었다. 그분은 애초에 없었다. 내가 다 자란 대나무를 가슴에 품었던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하게 구상하고 있었던 것뿐이다. 만약 구상하지도 않았는데, 자판에 손을 얹자마자 그렇게 글을 쓰는 사람이 있다면, 천재거나 천사가 귓속에 들어와 지시했기 때문일 것이다. 보통 사람에게 불가능한 일이다. 나는 지극히 평범한 보통사람이다. 그러니 가능했겠는가. 내가 철저하게 구상한 결과였지. 


구상은 얼개를 짜는 것으로 시작한다. 얼개 짜기, 즉 개요 짜기는 글쓰기의 기본이고 정석이다. 그것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모두 안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다. 정작 글쓰기에 들어가면 얼개 짜고 쓰는 사람이 드물다. 알고 있지만 실천하지 않는다. 그러면 모르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강의할 때도 내가 가장 강조했던 것이 얼개 짜기였다. 심지어 방법을 시험에 내기도 했다. 모두 답을 잘 썼다. 글쓰기에 들어가면 실천하지 않았지만. 


물론 나름대로 구상을 하리라. 단지 다 자란 대나무인지, 아닌지, 그것이 다를 뿐이다. 문동이 대나무를 일필휘지로 그릴 수 있었던 것은 이유가 있었다. 많은 대나무를 심어놓고 자라는 과정을 매일 관찰했다고 한다. 관찰하면서 특징과 모습을 유심히 보았을 테고, 그것을 기억해두었을 것이다. 이는 중요한 구상 과정이다. 사실 글을 쓰기보다 구상하는 시간이 더 길게 걸리는 게 당연하다. 


나의 관심 있는 제자 윤 군이 매일 구상한다고 했던 것도 거짓은 아니다. 윤 군, 요즘 귀가 간지러울 것 같다. 자주 예로 드니 말이다. 하지만 밥도 적당히 뜸을 들여야 되듯, 구상만 하고 있다고 글이 되는 것은 아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다. 어떻게든 써서 작품으로 만들어야 한다. 뭐든 적절해야지, 모자라거나 넘치면 안 된다. 구상도 그렇다. 구상만 하다 윤 군처럼 한 학기 내내 한 작품도 쓰지 못할 수 있으니까. 


나는 모티브나 에피소드 또는 감정 하나만 있어도 구상을 시작한다. 먼저, 소설 수필 시 동화 동시 중에 어떤 것으로 쓸지 결정한다. 그 후 하나의 그림을 마음속에 그린다. 윤곽이라도 그려지면 세밀한 부분들까지. 소설일 경우 인물관계나 서사를 대략적으로 그리거나 메모해 놓는다. 수필은 자유로운 형식이고 짧으므로 보통 머릿속에 큰 줄기를 잡고 대략 얼개를 짠다. 그 시간은 많이 걸릴 수 있고, 금세 될 수도 있다. 그런 다음 쓰기 시작한다. 


항상 그렇지는 않다. 어느 때는 구상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급히 쓰기도 한다. 그저 쓰고 싶은 의욕을 주체하지 못해 그야말로 되나따나 쓸 때다. 그러면 글이 삼천포로 빠지고, 일관성이 없다. 통일성도 없다. 삼천포로 빠질 때는 독자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선회하거나 정면 돌파해야 하며, 일관성과 통일성은 유기적 관계에 있으므로, 하나라도 어긋나지 않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글이 산만해지고 난삽해지며, 글의 의도가 독자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못해, 가독성을 잃게 된다. 그것을 나는 가장 경계한다. 


나는 독자들이 읽고 싶어 하는 글을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좋은 내용을 담고 있어도 읽기 힘든 글을 어찌 읽으랴. 누가 총 들고 서서 강요하는 것 아니고, 세금을 더 내라는 것도 아닌데. 공부나 연구 등 필요에 의한 것이라면 몰라도, 대부분 읽지 않을 것이다. 사실, 지금 이 글도 비슷하다. 하지만 가끔은 이런 글을 쓸 때도 있다. 혹시 내 경험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으니까. 유익하거나, 재미있거나, 감동이 있는 글을 쓰고자 하는 게, 나의 글쓰기 지론이므로. 


결론적으로, 구상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글을 쓰는 과정은 지난하다. 고치고 또 고치고, 쓰다가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 한다. 시간이 더 들고, 머리가 아프며, 도중에 그만 쓰고 싶을 정도로 힘들다. 그래서 제대로 된 글을 쓰려는 사람은 성죽재흉이 되어야 한다. 구상하는 데에 드는 시간을 아까워하면 안 된다. 꾸준히 그렇게 훈련하면, 짧은 시간에 성죽재흉이 되기도 한다. 


어느 날은 새벽에 눈을 뜨자마자 하나의 문장이 떠오르고, 그 문장을 중심으로 다 자란 대나무가 가슴에 있는 것처럼 기승전결이 그려질 때가 있다. 그러면, 바로 컴퓨터를 열고 타이핑을 시작한다. 그렇게 쓴 글은 퇴고할 것이 별로 없다. 오탈자나 띄어쓰기 정도밖에. 그래서 한두 번만 읽어보고 탈고할 때도 있다. 아주 가끔. 진정, 아주 가끔 말이다. 이것이 바로 성죽재흉(成竹在胸)의 매력이다. 


성죽재흉의 매력, 그 행복한 매력에 한 번만 빠져도 절대 헤어날 수 없다. 이것이 글쓰기의 진정한 매력이다. 어찌 외면하겠는가! 실은 나도 쉽지 않다. '직박구리' 새폴더에 '미완성 작품'이라 써놓고 쓰다만 것들을 몽땅 집어넣은 후, 수시로 한 문장 한 단락씩 부연하는 게 보통이다. 그래도 몇 번 맛 본, 성죽재흉의 매력만은 놓치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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