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명숙 Apr 03. 2023

나의 글쓰기 방향은

의도의 오류 줄이기 


글쓰기가 즐거우면서 두렵기도 하다. 글이 가지고 있는 제한성 때문이다. 글은 제한적이어서 드러난 것만 인정된다. 그것이 불편하다. 드러난 것을 가지고 감춰진 것을 유추해 내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어찌 글뿐이랴. 말이나 글이나 사람 아니 세상의 모든 것이 그렇다. 진실은 오히려 감추어져 있고 핵심은 드러나지 않은 채 변죽만 울리는 게 얼마나 많은가. 그래서 소위 말하는 ‘의도의 오류’가 생긴다. 


작가가 인식한 사유, 보거나 겪은 후 재해석한 사건 내지 상황 등을 그려내는 낼 때, 거기서도 의도의 오류가 생길 수 있다. 작가 자신이 그것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정확하게 그려냈는가의 여부에 따라서. 그건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보는 눈이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또 작가의 의도를 독자가 정확하게 읽지 못할 경우도 의도의 오류가 생긴다. 이 두 가지는 필연적으로 생길 수밖에 없다. 내가 글쓰기와 독서를 좋아하면서도 어려움을 느끼는 게 바로 이 부분이다. 


글을 쓸 때 다 드러내면 되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 있다. 하지만 글의 특성상 그럴 수 없다. 제한성 때문이다. 어떻게 모든 상황과 사건과 그때 느끼는 감정을 모두 드러낼 수 있으랴. 혹 모두 드러낸다고 하자. 그건 르포다. 문학이 아니다. 적절한 감춤과 드러냄을 필요로 하는 게 문학 아닌가 말이다. 


특히 시는 비유나 상징, 아이러니와 역설에 의해 진실을 감춘다. 시인이 인식한 세계에 대한 비평을 그러한 표현방법을 통해 말한다. 그래서 한두 번 읽어서 시를 이해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심지어 여러 번 면밀하게 읽어도 정확하게 시인의 의도를 읽어내기 어렵다. 시가 가지고 있는 애매성이 이해를 더 힘들게 하기 때문이다. 그것 또한 시의 특성이다. 쉽게 읽히는 시를 시적 형상화가 덜되었다고 보는 것도 그래서다. 


작가의 의도가 가장 솔직하게 드러나는 장르는 수필이다. 수필은 말 그대로 붓 가는 대로 솔직하게 쓰는 글의 특성을 갖고 있다. 그렇다고 시시콜콜한 것까지 모두 쓸 수 없다. 그러면 문학이 아닌 자료이고 르포이기 때문이다. 적절한 취사선택을 하는 건 작가의 작전과 역량에 달려 있다. 작가의 의도가 잘 드러날 수 있도록 하면서 문학성과 예술성을 갖추어야 하리라. 그런 면에서 쉬우면서도 어려운 게 수필 쓰기인지도 모르겠다. 무엇보다 수필은 산뜻한 문학이다. 


소설과 희곡 등은 또 그 창작 방법이나 속성이 다르다. 그러므로 장르에 따라 표현할 때 몇 번이고 생각한다. 이 짧은 문장 속에 내 생각을 어떻게 다 담을 수 있을까. 감추어져 있는 게 얼마나 많은가. 때로는 글의 장르에 따라 감추고 드러내는 것을 특성으로 하기도 하는데, 어떤 것을 드러내고 감출 것인가. 그렇다 해도 독자가 작가의 의도를 알 수 있도록 써야 하지 않을까. 의도의 오류가 있다 해도 짐작은 할 수 있어야 한다. 어렵다. 그런 부분들이 어렵다. 


작가 대부분이 고민하는 접점이 여기 아닐까. 작가가 창작한 글을 독자가 어떻게 읽을까 하는 것 말이다. 크게 두 부류의 작가로 분류된다. 독자가 어떻게 읽든 작품을 세상에 던져놓았으면 관심을 두지 않는 작가, 평론이나 대담 등을 통해 작가의 의도를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작가로. 이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작가의 성향이며 문학관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두 가지 모두 괜찮다고 본다. 때론 ‘작가와의 만남’이나 ‘사인회’ 등에서 면밀하게 창작의도와 배경, 내용과 문체 등을 밝힐 기회가 있다면 그것도 좋지 않은가. 그런 것에 전혀 간여하지 않는 작가도 있다. 생산한 작품은 독자의 몫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것도 나는 역시 괜찮다고 본다. 작가 마음에 오는 대로 하는 것을 존중하므로. 


독자가 작품을 읽을 때 먼저 배경지식을 가지고 읽는다. 내면에 축적된 다양한 지식과 경험을 통해 작품을 이해한다. 그것은 작가의 의도를 읽어내는 데 작용한다. 사실 작품을 분석하는 것도 감상을 잘하기 위한 것이며 의도를 잘 읽어내기 위해서다. 분석을 위한 분석이 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작품을 면밀히 읽음으로써 작가의 의도를 정확하게 알고 자기 체험화가 된다면 바람직한 독서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모든 게 쉽지 않다. 작가의 의도를 담아 적확하게 쓰는 것도, 작품을 잘 읽어 의도의 오류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것도. 그 쉽지 않은 지난한 작업을 나는 왜 놓지 못하고 하는 것일까. 머리 아프다고 하는 이 글쓰기와 글 읽기를 말이다. 의도를 모두 담지 못해 제한성을 가질 수밖에 없는 글쓰기, 문자 중독처럼 읽어야 하는 글 읽기. 그것도 운명인가 아니 숙명인가. 이 좋은 봄날에 나는 왜 쉽지 않은 이 일에 매달리고 있는가. 


오래 고민했다. 문학 공부를 시작하면서부터 늘 고민했다. 나는 왜 쓰는가 하는 것을. 모범답안은 의외로 단순했다. 그냥 쓰는 게 좋아서다. 대단한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게 아니었다. 그냥 좋아서 쓰되, 내용이 있어, 읽는 이가 공감하고, 나아가 감동이 있는 글. 이것을 염두에 두고 쓴다. 적어도 방향만은 가지고 있어야 할 것 같아서다. 그러면서 글이 필연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는 제한성 그것을 최소화하자는 게 나의 글쓰기 방향이다. 그것이 의도의 오류를 줄이는 방법이 되리라 기대하면서.      

이전 14화 성죽재흉, 글쓰기의 진정한 매력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