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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명숙 Jan 15. 2023

별명 3 : 지난한 사춘기, 울숙이

그때의 나를 이해하며


중학교 2학년 즈음, 나는 혹독한 사춘기를 보내고 있었다. 당시에는 몰랐다. ‘질풍노도의 시기’라는 말을 들었지만 내게 적용되는 것인지도. 가족 누구도 그 질풍노도 같은 내 지난함을 알아주지 않았다. 당장 먹고사는 게 급한 어른들은, 나의 그런 변화무쌍한 감정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냥 슬펐다. 모든 게 심드렁했고, 진지하기도 했다.  모순되게. 그러다 혼자 울었다. 그 울음이 시작된 지점과 경로를 알지 못한 채 사춘기의 종착지에 도착했던 것 같다. 울면서.


내가 존재할 이유를 찾고 싶었다. 그만큼 나는 염세적이었다. 찾을 수 없었다. 현실이 암울했고, 모든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집안환경도, 불공평한 세상도. 도대체 나를 지탱할 수 없었다. 정신없이 이쪽저쪽으로 갈팡질팡 치닫던 감정의 끝은 현실과 이상 사이의 괴리감만 불러왔다. 그것을 해소하는 방법이 울음이었다. 또 생각이 일관적이지 않아 괴로우면서도 행동은 일관성을 유지하려 애썼다. 그런 이중적 태도가 싫어 또 울었다.


겉과 속이 다르다고 생각하면 그 자체만으로도 괴로웠다. 내가 추구했던 이상적 인간상은 그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한없이 순수하고 고결한 사람이어야 했다. 지금 생각하면 황당하기 그지없지만. 누군들 그렇게 살 수 있으랴.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그럴 수 없는 것인데, 그때는 무엇보다 순수했기 때문에 그랬으리라. 더구나 나를 짓누르고 있는 맏이의식은 지나친 책임감을 들씌워, 극복할 수 없는 현실과 순수하고 고결한 이상 사이에서 괴로워했다. 그래서 자주 울었다. ‘울숙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중학교 때 나를 예뻐하셨던 수학선생님이 붙여준 별명이다. 시험을 못 봐도 울고, 두통이 있어도 울고, 비가 오는 것만 봐도 울고, 소화가 안 돼도 울었다. 어디서 그렇게 눈물이 나오는지 울어도 또 울어도 눈물이 났다. 학교에서 집 생각이 나도 울었고, 앞으로 어떻게 살 수 있을까 생각해도 울었다. 아무리 사춘기라도 해도 그렇게 우울할 수 없었다. 어머니와 할머니를 생각해도 눈물이 났고, 동생들이 입고 있는 남루한 옷을 봐도 눈물이 났다. 그 울음의 기원은 삼촌이었다. 당시에는 몰랐는데, 그 원인을 알게 된 게 겨우 몇 년 전이다. 


돌아가신 지 50년 된 삼촌과 있었던 추억을 글로 써 출간하는 과정에서 진정한 나를 만났다. 그러면서 사춘기 내 울음의 원인을 발견했고 나를 깊이 이해하는 시간을 가졌다. 오랫동안 나를 끌고 다니던 우울과 불안의 실체도 그때 알게 되었다. 쓰면서 울었고 퇴고하면서 울었다. 평생 울었던 것보다 더 많이 운 것 같다. 그러고 나서 내면의 아이, 나를 만났다. 그 후, 나는 슬프지 않고, 괴롭지 않으며, 아쉽지도 않다. 글쓰기는 이렇듯 치유하는 힘이 세다. 


다섯 살에 아버지를 여읜 나는 삼촌 덕분에 아버지의 부재를 의식하지 못했다. 아버지 못지않게 아버지가 돼주었던 삼촌. 그 삼촌이 중학교 1학년 말에 사고로 돌아가셨다. 그때부터 나는 숙명적으로 맏이의식을 갖고 살았다. 감당할 수 없는 능력 밖의 것들을 나는 왜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누가 강요한 적 없었는데. 단지 친척들이나 동네 어른들이 나를 만날 때마다, 네가 이제 집안의 기둥이다,라고 해서 그랬을까. 당시에는 아들 선호사상이 높았는데, 어째서 여자인 나에게 그런 말들을 했을까. 시대가 그랬다고 치자. 


아무튼 쓸데없이 진지하고 책임감 강했던 나는 감당하기 힘든 가정경제와 동생들 학비 등으로 괴로워했다. 시험을 잘 못 봐서 운 것도, 그런 이유에 기인한다. 당시 장학생으로 학교에 다니던 나는 학기마다 평균 90점을 유지해야 등록금을 전액 면제받을 수 있는 조건이었다. 시험을 못 봐서 90점이 안 되면 학비 부담 때문에 학교에 다닐 수 없는 건 불 보듯 뻔했다. 학업을 계속하고 싶은 마음은 절실했으니, 시험을 못 봤다고 생각하면 눈물이 안 나올 수 없었다. 그러면 두통이 생기고, 소화도 안 되었다. 학업을 잇지 못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들면서, 여의치 못한 가정형편이 기막혀 또 울었다. 


수학선생님은 내 사정을 잘 아셨다. 삼촌 사후 생긴 우울감과 불안감으로 학교에서 쓰러진 적이 있다. 그때도 선생님이 병원에 데리고 가셨고, 나를 깊이 위로해 주셨다. 울숙아, 그만 울어하면서. 명숙이가 우니까 ‘울숙이’가 되는 거라고 하셨다. 선생님이 나의 별명을 불러도 친구들은 내 별명을 부르지 않았다. 그만큼 친구들도 자랐기 때문일 거다. 내가 우는 속을 아주 모르지 않았고. 선생님이 별명을 불러도 기분 나쁘지 않았다. 선생님이 나를 생각해 주는 마음을 잘 알기 때문에. 


얼마 전, 나의 문학 강연에 중학교 때 남자동창생이 참석했다. 혹시 사춘기 때 저의 별명을 유추해낼 수 있는 분 계시냐고 물었더니, 그 친구가 손을 번쩍 들고 ‘울숙이’라고 답했다. 웃음바다가 되었다. 놀랐다. 친구들은 부르지 않았던 별명인데, 그 친구가 기억하고 있어서. 그만큼 나는 자주 울었고 선생님께 불렸던 별명이다. 별명을 시작으로 강연의 포문을 열었고, 글을 쓰면서 진정한 나를 만나고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게 된 과정을 진솔하게 이야기했다. 웃었던 사람들이 숙연해졌고, 많은 이들이 공감하며 함께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행복감을 느꼈다. 그날 강연은 성공적이었다. 


선생님은 중학교 졸업 후 진학하지 못한 나에게 학업을 잇도록 독려하셨고, 그 관심에 힘입어 고등학교를 마치고 어렵사리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 지금 수학선생님은 계시지 않다. 대학에 입학하고 학교로 찾아갔을 때, 선생님은 이미 하늘로 돌아가신 후였다. 객지에서 허겁지겁 사느라 연락드리지 못한 몇 년 사이에. 그때도 모처럼 찾은 학교에서 나오며 울고 또 울었다. 선생님이 하늘에서, 이 녀석! 또 우니? 이 울숙아! 하며 꾸중하실 것 같았지만 나오는 눈물을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다. 


내가 선생노릇하면서 어려운 학생들을 보면 그때의 내가 떠올랐다. 열서너 살의 나를 살펴주시던 수학선생님도 함께. 적어도 따뜻한 마음을 나누어주고자 했다. 이야기를 들어주고, 기도해 주는. 때론 친구 같고, 때론 엄마 같은, 소통할 수 있는 대상이 되려고 했다. 시간에 인색하지 않은 선생이고 싶었다. 따뜻했던 수학선생님을 조금이라도 닮은 그런 선생이.  그 마음이 제자들에게 얼마나 전달되었을지 모르겠지만 그것밖에 내가 선생님께 받은 사랑을 실천할 게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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