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산에 올랐다. 날씨가 춥다고 미디어에서 떠드는 바람에 지레 겁을 내서, 요즘 통 산행을 하지 않았다. 눈까지 자주 내려서 더욱 조심스러웠다. 그래서 천변 산책로만 걸었던 터였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달랐다. 벌써 봄빛을 머금은 따사로운 햇살이 유리창을 통해 집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산에 가서 확인하고 싶었다. 얼마나 봄이 가까이 왔는지. 나뭇가지를 보면 알 수 있을 테니까.
집 옆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 조금만 오르면 등산로로 접어든다. 질퍽거리는 대지는 해토되는 것처럼 물기가 가득하다. 등산화에 흙이 들러붙는다. 좋다. 이런 느낌. 은행나무 군락지를 지나는데, 고양이 두 마리가 햇볕은 쬐고 있다가 후다닥 달아난다. 순진한 녀석들. 닳고 닳은 길고양이들은 사람이 지나가도 가만히 있다가, 뒤를 돌아다보며 느릿느릿 숲 속으로 걸어 들어가기 일쑤인데. 겁을 낸다는 건 순진하다는 증거다.
야트막한 둔덕, 감국 군락지를 지났다. 서서 하늘을 본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은 소녀의 마음처럼 푸르다. 내 마음도 아직은 그렇다. 나이와 상관없이, 늙어가는 몸과 상관없이, 마음은 별다른 변화가 없다. 하늘을 보면 맑아지고, 들을 보면 넉넉해지며, 햇살을 맞으면 따뜻해진다.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가 보인다. 뒷동산에 올라 마을을 내려다보면 낮게 엎드린 초가지붕이 정겨웠던 옛날과 달리, 지금은 산으로 올라왔건만 여전히 올려다 보이는 아파트. 도시의 위엄처럼 그렇게 서있다.
등산로엔 눈이 없다. 응달에만 약간 희끗거릴 뿐이다. 잎사귀가 다 떨어진 나목들 사이로 보이는 맑은 하늘. 사진을 찍었다. 순백의 색깔보다 파란색이 더 순수해 보일 수 있다. 그것을 느낀다. 순수, 얼마나 잃지 않으려 애썼던가. 그래서 문학을 좋아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문학은 무엇보다 그 순수를 지향하는 게 본질일 테니까. 지금 같은 자본주의와 물질만능 시대에 그것을 추구할 수 있다는 게, 나는 어울리지 않게 다행스럽다. 시대착오적인 생각일지 몰라도.
산은 그런 순수를 회복하는 힘이 있다. 아니, 자연은. 자연은 인위적인 것을 거부한다. 자연 그대로 있기를 원한다. 자연 속에 있으면 나도 그와 같아진다. 그래서 나는 산이 좋다. 발밑에서 바스러지는 지난가을의 낙엽 같은 게 인생이라 해도, 산에 오르는 순간 잡고 있던 욕심을 놓게 된다. 그저 자연, 하나의 자연으로 존재하는 나를 발견할 뿐이다. 본래 갖고 있던 순수를 회복하면서.
나무엔 벌써 물이 오르고 있다. 나뭇가지와 끝이 달라졌다. 나는 동지가 지남과 동시에 봄을 느낀다. 눈이 오고 찬바람이 불어 겨울일 뿐이지, 겨울을 거의 느끼지 않는다. 그건 어릴 적에도 그랬다. 크리스마스가 지나면 봄기운을 느꼈으니까. 누군가는 너무 비약이라 했고, 누군가는 태고 적 조상의 유전자를 장착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직관적이어서 그런지도. 확실한 것은 내가 느낀다는 것이다. 나무 색이 변했다는 것을.
이제 머지않아 저 덜꿩나무 가지에 올망졸망 하얀 꽃이 피리라. 보라색 산도라지 하나가 피는 곳이 보인다. 쪽동백과 팥배나무 가지에도 봄이 기웃거린다. 층층나무를 지나 때죽나무 앞에 서서 손으로 만져본다. 산벚꽃이 거의 질 때쯤, 하얀 때죽나무 꽃이 팥배나무 꽃과 함께 피어 봄바람에 흩날리면, 그처럼 환상적일 수 없다. 올봄에도 어김없이 그럴 것이다. 자연이 아름다운 건 그 무언의 약속을 꼭 지키기 때문이리라.
세상살이하면서 힘든 것 중의 하나가 약속이었다. 입으로 내놓고, 또는 함께 말해놓고, 사회적 암묵임에도, 지키지 않는 사람들. 손해가 되더라도 약속한 것은 지키려 했던 나의 의식과 상충되어, 그 속에서 숱한 갈등과 배신감을 느꼈다. 그래서 자연을 좋아하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신뢰, 그것을 자연의 법칙에서 느끼므로. 조금도 어그러짐 없는 그것을.
목적한 곳까지 가는데 사십여 분 걸렸다. 줄기가 두 개로 나눠진 신갈나무 둥치는 제법 굵다. 나무에 등을 댔다. 차갑지 않고 포근한 기운이 내 몸을 타고 들어온다. 돌아서서 껴안는다. 한 아름이다. 이마에 조금씩 땀이 흐른다. 하늘을 본다. 등산길로 접어들었을 때보다 더 파랗게 보인다. 이제 봄도 머지않았다. 나무가 물관부를 통해 생명의 바탕이 되는 물을 길어 올리듯, 나 또한 그러리라. 내 삶 곳곳에 있는 글감들을 길어 올려 한 줄 글이라도 써보리라. 나뭇가지 끝이 바람에 조금 흔들렸다. 내 생각에 동조하는 듯.
산에서 내려올 때는 햇살이 더 따사로웠다. 이제 봄도 머지않았다. 콧노래가 저절로 나온다.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저 햇살과 산바람 속에서 축축했던 마음이 뽀송뽀송하게 말랐기 때문이리라. 자연이 주는 혜택이다. 그것도 무상으로. 나는 아무래도 매일 산으로 가야겠다. 값없이 주는 이 모든 것을 누리기 위해. 산에서 드는 몇 가지 생각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