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아버지
저녁 산책길은 한산했다. 며칠째 엄습해 온 추위 때문이리라. 녹았던 얼음이 다시 얼고 있었다. 청둥오리와 왜가리가 보이지 않았다. 두리번거리다 혹시 길이 얼었을까 봐 땅을 보며 걸었다. 넘어지는 게 가장 무섭다. 그러다가 어디라도 부러지면 낭패니까. 며칠간 낮에 산행을 했는데, 눈이 오고부터 산에 못 가고 산책로를 걷고 있다.
산책은 마음을 정돈하게 한다. 혼자 발밤발밤 걸으며 글감 하나를 떠올려 글의 얼개를 짜기도 한다. 어머니나 친구들에게 전화를 하기도 하고, 음악을 들으며 걷기도 한다. 옆에서 누가 말을 걸면 말동무가 되는 경우도 있다. 지나는 바람, 오리나 왜가리, 저녁별이나 달, 어느 것이든 상관없이 내키는 대로 대화를 하기도 한다. 그도 아니면 아무 생각 없이 목적한 곳까지 걸어갔다 되돌아온다.
반환점을 돌아올 때였다. 한 남자가 나를 앞질렀다. 걸음은 상당히 힘차 보였다. 뒤에서 나를 앞지르다니. 누구에게 뒤떨어지는 내 걸음이 아닌데. 그만큼 남자는 씩씩하고 가볍게 걷는다. 나와 달리, 다시 얼기 시작하는 개울에 관심이 없는 듯, 앞만 보고 걷는다. 카키색 점퍼에 청바지를 입고 챙 있는 모자를 쓴 남자. 지나칠 때 슬쩍 본 얼굴과 뒷모습으로 볼 때 사십 대 후반쯤으로 보인다.
내가 주목하는 것은 남자의 손에 들린 가방이다. 음식점 종이가방 두 개. 치킨이다. 의아하다. 가족이 많은 걸까. 저녁에 먹는 치킨 그 맛을 모르는 사람은 없으리라. 가족에게 빨리, 식지 않은 저 음식을 먹이고 싶은 마음에, 저리도 가볍게 잰걸음을 옮기는 걸까. 남자의 걸음에는 흥이 실려 있다. 얼마나 빠른지 숫제 뛰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남자와 나 사이에 거리가 생긴다. 20미터쯤 앞이다. 남자는 한 손으로 전화를 받는다. 응, 지금 가고 있어. 금방 가. 짧게 대화를 하고 남자는 전화를 끊는다. 또 힘차게 걷는다. 나도 뒤따라간다. 산책로에는 사람들이 없다. 나와 앞서가는 그 남자뿐이다. 우리 아파트에 사는 사람일까. 치킨 가방이 두 개인 것으로 볼 때, 가족이 많다기보다, 근처에 남자의 부모가 사는 것 아닐까. 아마도 하나는 부모에게 , 하나는 남자의 집으로, 갖고 가리라.
남자는 어느새 100미터쯤 앞서간다. 그만큼 걸음이 빠르다. 바람을 안고 간다. 내 걸음이 느려진다. 남자의 시선이 멀어지자 작품 구상으로 생각이 기울었다. 그럭저럭 한 편이 만들어질 것 같다. 웬만큼 구상이 끝났을 때, 남자는 아예 보이지 않는다. 아파트가 코앞이다. 남자는 저 어느 공간 속으로 들어갔으리라. 아이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치킨 앞으로 달려올 것이며, 남자의 아내는 밥상을 차릴 것이다. 남자는 어느 아이의 아버지리라.
아버지, 나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다. 다섯 살 때 돌아가신 아버지가 나를 사랑했다지만 실감 나지 않는다. 아슴아슴하게 실루엣처럼 남은 기억 속의 아버지는 약병을 열어 발에 약을 바르던 모습과 아버지를 태운 상여가 건너편 산으로 쓰러질 듯 올라가던 모습뿐이다. 눈물짓는 할머니 등에 업혀 울며 그것을 바라보던 기억이 꿈인 듯 생시인 듯 아슴아슴하기만 하다.
남자는 분명히 어느 아이의 아버지리라. 아니면 치킨이 담긴 종이가방을 들고 그렇게 신나고 힘차며 잰걸음으로 걸을 수 없다. 인생에서 무엇이 그리 신나는 일이 있을 거라고 그런 걸음을 걸을 수 있을까. 내 짐작이 틀림없다. 치킨을 들고 온 아버지를 반길 아이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그려진다. 남자는 입에 양념을 묻혀가며 맛있게 먹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흐뭇하리라.
남자의 부모는 아들이 사 온 치킨을 받으며 얼마나 또 함함했을까. 내 짐작이 어긋날 수도 있겠지만 수프가 식지 않을 만큼의 거리에 사는 부모일 확률이 높다. 함께 산다면 굳이 가방 하나에 넣을 것이지, 두 개로 나눌 필요 없을 테니까. 부모 자식의 이상적인 주거 공간 거리가 수프가 식지 않을 만큼의 거리라고 하는 소설을 읽은 적 있다. 그건 아마도 부모가 원하는 거리리라. 자식은 그렇게 가까운 거리를 원치 않을지 모른다. 모두 같지는 않겠지만.
내 짐작이 틀릴 수도 있다. 아마 자녀가 여럿이어서 한 마리로는 부족해 두 마리를 샀을지도 모른다. 우리 아파트는 다둥이 가족도 꽤 있으니까. 두 개의 가방에 넣은 것은 혹시 약한 가방 끈이 끊어질 수 있어 그랬을 수도 있고. 나는 왜 섣불리 부모에게 드릴 치킨이라고 단정한 상상을 했던 걸까. 내면에 웅크리고 있는 내 소망일까. 고개를 저었다. 그런 생각까지도 이제 버려야 하는 시대를 살고 있으므로.
산책을 마치고 집으로 들어왔다. 남자의 힘찬 발걸음이 여전히 눈앞에 어른댄다.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의 모습이 그럴까. 그 사랑을 받지 못한 내게 연민을 느꼈다. 나를 가만히 안아주었다. 어둑해져 가는 하늘을 보며. 별 느낌 없이 60여 년을 지내왔는데, 불현듯 아버지가 그립다. 추억이 없어도 아버지라는 이름만으로도 그립다. 큰 나무 같은, 산 같은, 사람이 있다면 그는 아버지리라. 막연하지만.
구상한 얼개를 중심으로 쓰기 전에, 산책길에 본 남자의 모습에서 생각해 본 이야기를 먼저 쓴다. 아무리 완성도 있는 작품을 구상했더라도 쓰는 건 작가 마음이다. 그만큼 남자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것을 놓치지 않아야 글감이 확장된다. 솔개가 먹잇감을 낚아채듯, 잡은 것을 절대 놓치지 않듯, 결사적으로 잡고 써야 한다. 마음에 오는 한 문장, 목격한 한 장면, 인상, 상황, 느낌, 사건 등 어떤 것이라도.
그 남자의 모습에서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불러낸 것은 저녁이 갖고 있는 특성 때문일까. 온 가족이 집으로 몰려들고, 한없이 안온하던 그 잊을 수 없는 느낌. 내 기억 어느 곳에 실오라기처럼 가느다랗게 남아 있는 그 느낌을 붙잡고, 아버지를 떠올리고 싶었던 걸까. 막연하기만 한 느낌일지라도. 가만히, 불러본다. 아버지, 아, 버, 지. 내 의지와 상관없이 눈에 눈물이 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