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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명숙 Jan 30. 2023

문득, 사랑고백 한 이유

아들


아들이 한밤중에 문득 전화한 이유가 있었다. 거기다 두 시간 넘도록 통화한 후, 느닷없이 사랑한다고 고백한 것은. 그 이유를 알고 나서도 괜찮았다. 어떤 행동을 하게 한 그 이유는 의도가 내포되었다는 의미인데, 나는 의도 있는 행동을 썩 좋아하지 않는다. 속 보이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번 일은 괜찮았다. 우리가 살면서 속 좀 보이면 어떤가 싶기도 했다.


나이 들면서 나도 가끔 속 보이는 행동을 한다. 그걸 은폐할 필요성을 느끼거나, 그러기 싫어, 아예 고백하는 경우도 있다. 낯 뜨겁더라도 드러내는 게 편하다. 우리가 살면서 이중적일 때 있잖은가. 필요에 의해. 하지만 가끔 민낯을 드러내는 게 솔직하고 순수해 보이기도 한다. 아무튼 나도 가끔 속 보이는 행동을 한다.


그건 지극히 지엽적 대상에게만 한다. 가족들에게. 내가 관계 맺고 있는 주위사람에게 하지 못한다. 아직은 품위를 지키며 사회생활을 해야 하기에. 아, 또 있다. 글을 쓰면서 보이지 않는 독자들에게 민낯을 보인다. 특히 수필을 쓸 때는 솔직하게 써야 하므로 속내를 숨기지 않는다. 그것이 싫다면 소설을 써야 한다. 그러면 그 대상이 지엽적인 것이 아니라 훨씬 광의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건 글 쓰는 사람의 특권이다.


사랑고백 한 다음날, 아들이 또 전화를 했다. 아무래도 나의 ‘아들딸과 거리두기’는 성공하는 것 같다. 내가 전화를 하지 않으니 아들딸이 하는 걸 보면. 아들은 벌건 대낮에 전화를 했다. 어젯밤에 그렇게 긴 통화를 하더니 오늘은 또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그 예감이 또 잘 맞는 것도 문제였다. 물감이나 캔버스 값 후원을 염두에 두고 너스레 떤 게 아닌가 싶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왜? 후원금 부탁하려고 전화한 거니? 얼마, 얼마면 돼! 내 목소리가 조금 커졌다. “아, 아니라니까요. 걱정 마세요, 부탁할 일 있으면 망설이지 않고 할게요.” 그럼 왜 어제 전화하고 오늘 또 하느냐고 재차 물었다. 아들은 전화 안 해도, 해도, 혼나야 하는 거냐며 껄껄 웃었다. 나는 그게 흠이다. 참고 있으면 손해 볼 일이 거의 없는데, 꼭 긁어 부스럼 만들 듯 공연히 물어봐서 손해 볼 때가 많다. 속만 들켰다.


갑자기 사랑고백을 한 것의 이유는 이러했다. 아들이 소통하는 사이트가 있다. 거기에 며칠 전에 글 한 편이 올라왔다. 어머니가 투병 중이었는데 돌아가셨다는 내용이다. 아직은 젊기 때문에 돌아가실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는데, 갑자기 악화돼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며, 장례 후 어머니가 쓰던 베개를 안고 한없이 울었다는 내용의 글이다. 그 이야기를 읽는 사람 중 한 사람이 오늘 모두 부모님께 전화라도 한 통 하자고 했다. 그래서 모두 찬성했고 아들도 내게 전화를 한 거였다.


그 이야기를 읽고 아들은 아무리 작업이 급해도 엄마와 통화하고 싶었단다. 그런 마음이 얼마나 가랴. 며칠 그러다 말 것이 틀림없다. 전에 군대 갔을 때 휴가 나오면, 설거지를 깨끗이 하고 행주를 빨아 말린 후 네모반듯하게 접어놓곤 했다. 시키지 않아도 청소기를 돌렸다. 전역해도 그럴 줄 알았다. 하지만 전역 후 일주일도 안 돼 예전으로 돌아가는 것을 목격했다. 아들의 애틋한 마음이 얼마 가지 못할 거라는 짐작은 그 때문이다.


결국 발설하고 말았다. 얘, 며칠이나 가겠니. 그냥 하던 대로 해! 사람 긴장 시키지 말고. 그래도 아들은 낄낄 웃는다. 저도 옛날 일이 생각나는 게지 싶다. 생각해 보면 아들은 마음이 약했다. 텔레비전을 보면서도 슬픈 장면이 나오면 눈물을 닦던 아이였다. 꾸중을 들으면 금세 눈물 뚝뚝 흘리며 죄송하다고 하던 아이였고. 그런 아들이 그 글을 읽고 울었을 게 뻔하다. 갑자기 이 어미 생각도 났을 거고.


그날 한 말 중에 사랑고백보다 더 많이 한 건 ‘고맙다’는 말이었다. 미술 전공시켜 준 것이 고맙고, 행복하게 해 줘서 고맙고, 집안 걱정 안 하게 해 줘서 고맙고, 또 뭐라든가. 아무튼 좋은 말은 다 갖다 붙이며 고맙다고 했다. 내가 평생에 들을 듣기 좋은 말을 그 두 시간 남짓한 통화에서 다한 것 같다. 그게 낯 뜨거웠는지 끝에는 유머 같지도 않은 말을 유머처럼 내놓았다.


“그림 재능은 엄마가 물려준 게 아니고, 아빠인 것 아시죠?” 그래놓고 히힛 웃었다. 그건 인정한다. 그러면서 큰소리치기 시작했다. 자기가 세계에서 그림 잘 그리는 100명 중에 든다나 뭐라나. 세계는 그만두고 대한민국에서 100명 안에만 들어도 좋겠다며 빈정댔다. 그래도 웃으며 그렇게 아들을 못 믿느냐고 흰소리를 했다. 가만 보면 남편은 그림 솜씨뿐 아니라 흰소리하는 것까지 물려준 게 아닌가 싶다.


다빈치의 인체해부도를 보고 감동해서 그림을 시작한 아들이다. 하여간에 감동 하나는 국보급으로 잘한다. 조카가 태어났을 때도 감동해서 눈물이 나왔다 하고, 군대에서 작은 화초를 키우는 선임병 보고도 감동했다 한다. 별것을 다 보고 감동하는 아들이다. 그러니 사이트에 올린 어떤 이의 사연을 읽고 가만히 있겠는가.


이야기를 들으니 문득 전화해서 내게 사랑고백을 한 이유가 납득되었다. 20초면 끝나던 통화를 두 시간 남짓하게 한 것도. 그것도 내가 끊자고 종용해서 끊은 것도. 또 통화 끝에 엄마 사랑해요 한다. 한 번 하기가 어렵지, 다음부터는 쉬운가 보다. 생각해 보니, 나도 어머니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은 것 같다. 저녁때 전화해서 어머니에게 사랑고백을 해볼까. 고백은 저녁에 하는 게 효과적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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