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사람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명숙 Feb 28. 2023

할머니 무릎학교, 주교사와 보조교사

할머니

    

고향에서는 한 살 차이가 나는 사람에게도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실명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아버지끼리 친구, 고모나 삼촌끼리 친구, 형이나 언니들끼리 친구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생판 모르는 사람도 누구 집 자손인지 따지면 다 알게 되는. 그런 실명의 공간인 고향에서는 조상들 욕되게 하는 게 가장 못할 짓이었다. 그런 교육을 어릴 적 할머니 무릎 아래서 배웠다. 어떤 아동 학자는 그걸 ‘할머니의 무릎학교’라고 지칭했다.

 

겨울에 우리는 화롯가에 둘러앉아 할머니의 옛날이야기를 듣곤 했다. 장화홍련전, 흥부놀부전, 유충렬전, 숙향전을 비롯한 고전소설과 혹부리 영감이야기 같은 전래동화를 들었다. 들어도, 들어도, 재미있어서 화롯가뿐 아니라 잠자리에 누워서도 해달라고 졸랐다. 할머니는 이야기 좋아하면 가난해진다고 하면서도 우리들이 졸라대는 것을 외면하지 못했다. 막냇동생은 할머니 이야기보다 앞질러 퐁당퐁당 다음 이야기를 뱉어내곤 했다. 일명 스포일러. 우리는 하지 말라고 말리다 끝내는 까르르 웃고, 떠들다가 어느새 잠이 들었다.


할머니의 무릎학교에서 들은 것 중의 하나는 우리 선조에 대한 이야기였다. 너희는 고운 자손이다, 고운 자손이야. 조상을 잊으면 안 돼야. 고운이 도대체 무엇인지, 고운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그저 ‘고운’이라는 말만 뇌리에 남은 채 자랐다. 때로는 ‘공운’이라고 들리기도 했다. 아무도 그 말을 해주는 사람이 없는데 유독 할머니는 강조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고운 최치원 선생’을 시조로 하는 최가라는 것이었다. 놀라웠다.


왜냐하면 할머니는 문맹이었고, 일곱 살에 시집온 민며느리였다. 교육의 혜택을 전혀 받지 못했다. 1800년대 말에 출생한 여성이었으니 그리 이상할 일도 아니었다. 할머니의 아버지는 당시 한학자였고, 마을에서 훈장이었다고 한다. 나라가 일본에게 외교권을 빼앗기자 분을 참지 못해 몸부림치다 갑자기 병이 나 돌아가셨고, 그 충격으로 할머니의 어머니는 실명했단다. 사돈 맺기로 약속한 친구였던 우리 증조할아버지가 그것을 알고, 일곱 살짜리 할머니를 업어 와 민며느리로 삼았다. 그러니 무슨 교육을 받을 수 있었으랴.


할머니는 그래도 많은 이야기를 어디서 들었는지 우리에게 들려주었다. 그중에서 가장 강조한 것이 조상의 뿌리였다. 시조인 ‘고운 최치원 선생’에 대한 것과 ‘충’ 그리고 ‘효’를 중심으로 한 이야기들을 우리가 조르기만 하면 해주었다. 내가 자라던 시절 자체가 나라나 대통령 흉을 못 보던 때였다. 나라와 사회에 큰 불만을 갖지 않고 모든 걸 내 문제로 인식하고 살았던 게, 그래서였는지도 모르겠다. 효는 이때나 그때나 한없이 강조해도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요즘엔 ‘충’도 그렇지만 ‘효’의 개념이 조금 달라지긴 했으나, 근본은 같다고 본다.


내가 외할머니가 되면서 우리 할머니 생각이 자주 났다. 무릎학교에서 배운 것처럼 외손자들에게도 해주고 싶었다. 어쩌다 한 번 가는 정도이니 가능하지 않았다. 갈 때마다 동화를 읽어주고 옛날이야기를 해주기는 하지만. 할머니의 무릎학교는 이제 사라졌다. 함께 살지도 않으니 말이다. 그나마 밥상머리 교육은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부모들이 할 수 있겠지만 할머니의 무릎학교는 사라진 지 오래다.


조부모는 손자녀를 그저 예뻐만 해 주면 된다는 얘기가 공공연히 떠돈다. 교육은 아이 부모가 한다며. 그 말을 직접 들은 지인도 있다. 서운하고 어이없지만 그게 현실이라고 했다. 그런데 나는 왜 착각할까 모르겠다. 우리 딸은 안 그럴 것 같았다. 손자들이 태어나자 몇 살에는 무엇을 시키고, 어린이집은 어디에 보내고, 몇 살에 유치원 보낼 것인지, 그 유치원은 어디일지, 혼자서 궁리하고 들떠서 딸에게 말했던 적이 있다. 딸은 시큰둥하게 듣는 둥 마는 둥 하더니 한 마디 했다. 엄마, 그건 내가 알아서 할게,라고.


그 말이 나도 서운했다. 지인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그래도 물러서지 않았다. 내 유전자가 25%는 들어가 있다고, 나도 권리가 있다고, 딸에게 항변했다. 할머니의 무릎학교가 얼마나 중요한지, 내가 차를 형편에 넘치게 튼튼한 차로 바꾼 이유를 말했다. 박물관과 전시회 등 체험학습을 위해 아기들을 자주 데리고 다닐 거라고. 그래놓고 지금까지 한 번도 간 적은 없다. 생각처럼 내 삶도 단순하지 않기 때문이다.


올해 들어 여섯 살이 된 온이는 어린이집을 수료하고 유치원에 간단다. 엊그제 딸네 갔다가 온이가 갈 유치원을 돌아보았다. 산 밑에 있는 오래된 곳이었다. 시설은 낙후하지만 교사들이 사명감을 가지고 교육한단다. 자연 속에 있어 채소를 직접 키우고 자연체험을 마음껏 할 수 있으며, 무엇보다 유치원의 원훈이 재미있다며 딸이 웃었다. 원훈이 무엇이냐는 내 말에, ‘충’과 ‘효’란다. 더구나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한단다. 최고의 유치원이라고, 잘 선택했다고 하는 내 말에 딸이 말했다. 엄마는 그럴 줄 알았다고.


내가 할 수 없는 할머니의 무릎학교 같은 곳이 지금에도 있다는 게 신기했다. 개성이나 재능계발을 앞세우는 교육기관이 대부분인데, 충과 효를 내세우다니 흡족했다. 개성과 재능계발도 필수다. 그건 교육과정에 당연히 들어 있을 터이다. 나 역시 그쪽에 있었던 경험으로 볼 때, 걱정할 일이 아니다. 자연 속에서 마음껏 뛰어놀며, 나라를 사랑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는 아이로 자라도록 교육받을 수 있다니, 더 바랄 나위 없다. 나는 가끔 가서  사자소학이나 한 구절씩 가르치고 이야기나 해주며 놀면 되리라.


지금은 실명의 공간이 아니고 익명의 공간에서 살고 있다. 하지만 나라와 조상에게 누를 끼치는 짓은 당연히 경계해야 하고, 그렇게 가르쳐야 한다. 익명의 공간인 듯해도 어찌 보면 예전보다 더 실명의 공간인지 모르겠다. 인터넷 때문에. 예전에 했던 일이 어느 날 갑자기 수면 위에 떠올라, 지금까지 쌓아놓았던 명성을 무너뜨리기도, 부상시키기도 하는 요즘이다. 그러니 자식 교육은 더욱 중요하지 않을까 싶다.


지금까지 내가 살아가는 방식도 생각해 보면 할머니의 무릎학교에서, 주교사인 할머니와 보조교사인 어머니로부터 배운 것 같다. 부디 우리 온이가 기독교 사상을 바탕으로 한 유치원에서 ‘충’과 ‘효’를 배워 이 사회에 꼭 쓸모 있는 사회 구성원으로 자라기를 바란다. 이제 곧 3월이다. 입학철이다. 유치원 예비소집 때 받아온 가방을 보여주며 자랑하던, 온이의 밝은 모습이 어른거린다. 나도 덩달아 설렌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