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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명숙 Apr 11. 2023

남자 둘과 여자 하나가 만나다

남자동창생 


남한산성에는 벚꽃이 아직 한창이었다. 산 아래는 다 졌건만. 눈송이처럼 날리는 꽃잎이 부풀어 오른 배꽃 봉오리 위에 떨어졌다. 몽환적이다. 아니 낭만적이다. 산성 안에서 ‘용’과 ‘기’ 두 남자동창생과 점심 약속이 있는 날이다. 벚꽃과 배꽃 그리고 어릴 적 친구들. 잘 어울리는 풍경이다. 남자 둘과 여자 하나가 만나면 무슨 이야기를 할까. 기대하시라, 개봉박두! 


며칠 전 친구 ‘용’이 전화했다. 봄이 되었는데 밥이라도 한 끼 하자고. 가까이 있는 ‘기’도 부르자고 했다. 기는 얼마 전에 만나 코다리찜 먹었던 친구다. 의기투합. 우리 셋이 점심 먹고 담소 나누기로. 용은 하던 사업 정리하고 쉬는 중이라 했고, 기 역시 퇴직했다고 하니 의기투합이 쉬웠다. 다행히 나도 오전에만 강의가 있어 오후는 한유한 날이었다. 불과 작년만 해도 함께 모이기 쉽지 않았다. 모두 하고 있는 일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가까이 지내는 남자사람친구가 몇 있다. 초등학교는 물론이지만 중학교까지 남녀공학에 다녔기 때문이다. 더구나 나이 들면서 남자동창생이 스스럼없어졌다. 전에는 가리기도 했는데. 또 솔직히 남자친구가 편하다. 평생 사회생활을 해서 그럴까. 집안이나 살림 이야기하는 게 재미없다. 그건 살림을 엉터리로 하고 있기에 그런 건지 모르겠다. 아무튼 이런저런 이유로 여자친구보다 남자친구가 더 편한 게 사실이다. 


식사하며 기가 갑자기 말했다. 중학교 다닐 때 내가 참 예뻤다고. 얼마 만에 들어보는 말인가. 과거형이긴 해도 예뻤다고 하니 기분 좋다. 용도 그렇다고 맞장구쳤다. 둘이서 이 누나 놀리는 거냐고 농지거리를 했다. 뭐 별 것 없다. 그렇게 시답잖은 이야기나 하고 많이 먹으라커니 다이어트 중이라 안 된다커니 하다가 웃었다. 따지고 보면 대단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아니다.


내가 수저를 놓자 기가 사심 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밥 한 공기 더 하지. 벌써 그만두는 거야?” 이런! 지난번 코다리찜 먹을 때 밥 두 공기 먹은 게 생각나서 하는 말 같았다. 어쩌면 용에게 그 일을 이런 식으로 소문내는 것일까. “뭐야! 내가 언제?” 시치미를 뗐다. 기의 옆구리를 주먹으로 가볍게 치며. 기가 넘어갈 듯 웃었다. 용은 뜨악한 표정으로 쳐다보다가 갑자기 웃었다. 눈치챈 듯했다. “그래, 나 밥 두 공기 먹는 여자야! 어쩌라구.” 결국 그날 있었던 이야기를 내 입으로 발설하고야 말았다. 


식사 후 찾은 카페는 앞산이 훤히 보이는 위치에 있었다. 넓은 창 너머 저만큼에 푸르러지고 있는 산자락, 하얗게 무더기로 핀 산 벚꽃, 식곤증처럼 밀려오는 봄의 정취. 우리 셋은 커피를 앞에 놓고 한동안 산자락만 쳐다보았다. 그러다 서로 싱긋 웃었다. “좋지? 너무 바삐 살아서 이런 것도 느낄 새 없었어.” 한 친구가 말했다. 셋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동안 침묵. “이제 자주 보자. 이게 뭐야, 겨우 한 번씩이나 보고.” 또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떻게 하면 더 잘 살까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 건강하게만 살자고 했다. 또 시간 나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전화해서 밥 먹자고도 했다. 밥이 참 중하긴 하다. 생명의 원천이니까. 갑자기 웃음이 나서 견딜 수 없다. 웃음을 터뜨렸다. 둘은 공연히 나를 따라 웃었다. 그러다 물었다, 왜 웃은 거냐고. “좀 멋진 말을 하지, 지금까지 먹고산 밥 먹자는 말이 웃기지 않아?” 셋은 또 웃었다. 그래, 그래, 하면서. 


하나도 스트레스받을 일 없고, 눈치 볼 일 없고, 잘 보일 일 없는 친구들이다. 서로 그렇다. 그러다 학창 시절 이야기로 돌아가 소식 없는 친구를 궁금해했고, 얼마 후에 있을 친구 딸의 결혼식에 어떻게 갈지 논의했으며, 몇이서 다음 달 초에 만나서 놀자는 이야기도 했다. 그다지 생산적인 담소는 아니다. 그래서 좋다. 꼭 생산적이거나 사회적일 필요 있을까. 그럴 일도 이젠 별로 없다. 


얼마의 여윳돈을 주식에 투자할 건지 은행에 예치할 건지 이야기하다, 소위 잘 나가던 시절에 호기롭게 돈 쓰던 때, 군대 생활하던 시절까지 비약되었다. 그러다 각자의 어머니 돌아가신 이야기를 했다. 둘 다 어머니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감동적이었다. 남자들의 생각은 좀 다르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하긴 누군들 어머니의 뱃속에서 태어나지 않은 사람이 있던가. 


용과 기는 7년 만에 만났단다. 그러니 할 이야기가 많으리라. 나는 두 사람을 각각 얼마 전에 만났으니까 한걸음 물러나 있었다. 둘이 마음껏 대화하도록 추임새만 넣으며. 나는 주로 듣는 편이다. 작가는 말하면 손해다. 듣는 게 남는 장사다. 할 이야기가 있다면 글로 써야 한다. 대화가 끊어지면 슬쩍 부추겨서 이야기하게 만들고 또 듣는다. 오전에 강의를 하느라 말을 많이 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람들과 있을 때 대체로 그런 태도를 취한다. 더구나 용과 기는 7년 만에 만난 사이지 않는가. 


헤어져 돌아올 때, 벚꽃 이파리가 바람에 흩날려 차창을 간질였다. 마치 우리에게도 아직 꽃잎 같은 날들이 남아 있다고 말해주는 듯. 마음먹기에 따라 그럴 수 있으리라. 남자 둘과 여자 하나가 만나 나눈 이야기는 별 것 아닌 것들이었다. 하지만 마음 편했고 즐거웠다. 하긴 모든 순간들이 대단히 의미 있어야 할 필요 없다. 그래도 살다가 불쑥 이 날 이 순간이 꽃봉오리였다고 느낄지 모를 일이다. 무엇보다, 요즘 내가 삶에 보충하는 '현재 쾌락적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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