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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명숙 Apr 17. 2023

그의 마을 앞 버스 정류장을 지나며

가방과 그  

     

그 길이다. 아스팔트로 곧게 뻗었다가 다시 약간 구불구불한 길. 바로 그 길이다. 가까이 보이는 산자락엔 산벚꽃이 지고 벌써 잎사귀가 은성해지고 있었다. 그때의 나는 저 산들처럼 빨리 자라는 게 두려우면서 또 빨리 자라고 싶은 양가적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길가 과수원의 배꽃처럼 부풀어지는 가슴을 음울한 마음이 눌러대던 그 시절의 그 길. 바로 이 길이다. 


청소년기의 나는 이 길을 2년 반 동안 버스통학으로 다녔다. 지금처럼 아스팔트가 깔리지 않은 자갈길, 멀미가 날 것처럼 구불대는 길, 40분마다 한 번씩 다니는 낡은 버스, 차 안을 가득 메운 남녀중고등학생들. 서로 밀리고 밀려 한 발자국도 옮길 수 없었고, 숨도 쉬기 힘들 때가 잦았다. 그래도 그 버스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학교에서 집까지 40리 길이었으니 걷기엔 만만치 않았다.


버스 정류장은 그대로 있었다. 저쯤에서 아침이면 버스에 오르던 남학생이 있었다. 까마득하게 잊었는데 그곳을 지나면서 불쑥 떠오른다. 가라앉았던 부유물을 막대기로 저었을 때처럼 많은 기억들이. 인간의 기억력은 한계가 있는 줄 알았는데, 어느 때는 그 한계를 초월한 것처럼 끝없이 떠오르기도 한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샅샅이. 내 뇌 속에서 잠자고 있다가 갑자기 깨어나는 것처럼. 


그 남학생은 중학생인 나보다 두 학년 위인 고등학생. 곱상한 얼굴, 교모에 달린 모표처럼 반듯한 태도, 시골 아이 같지 않은 뽀얀 피부엔 여드름이 듬성듬성 나 있었다. 버스가 출발하여 학생들이 타기 시작하는 초입에 살았던 나는 아침 통학 버스에 항상 앉아 갈 수 있었다. 네 정류장 후에 타는 그는 학생들이 이미 빼곡하게 들어찬 버스에 타야 했지만.


버스 좌석에 앉으면 난 늘 창밖에 시선을 두었다. 창가나 통로 옆 자리에 앉을 때나 늘 그랬다. 삼촌의 갑작스러운 부재로 우울감에 시달리던 나는 표정 없는 아이였다. 이성에 관심을 가질 나이였으나 내겐 해당사항 없음이었다. 모든 게 불안했고 두려웠으며 툭하면 눈물이 났다. 아무 이유 없이 우는 내게 수학선생님은 ‘울숙’이라는 별명을 붙여줄 정도로, 우울감이 심하던 나에게 자연이 그나마 위로가 되었다고 할까. 


그러다 묘한 느낌이 들어 고개를 들어보면 그가 내 옆에 서 있곤 했다. 가만히 나를 쳐다보면서. 언제부터 그랬는지 알 수 없다. 그것을 인식하는 데에 시간이 걸렸을지도 모른다. 남에게 관심이 전혀 없던 나였으니까. 진한 잿빛 가방이 내 무릎에 닿기도 했는데, 그걸 안 그는 얼른 가방을 들어 옆구리에 끼기도 했다. 그 시절엔 앉은 사람이 가방을 들어주는 게 암묵적인 규칙이었다. 성을 가리지 않고. 


그의 가방을 들어주게 된 것은 그로부터 얼마간 시간이 지났을 때였다. 엄밀하게 따지면 내 가방을 그가 먼저 들어주었다. 하교 길에서였다. 집으로 가는 버스에 내가 간신히 올라탔을 때, 안내원이 어찌나 밀어대던지 내 의지와 상관없이 버스 중간에 간신히 발을 디디고 섰다. 앞뒤 옆에 들어찬 학생들로 가방은 저만큼에 있고 몸은 한쪽으로 밀려와 있었다. 그때 누가 가방을 잡아당기는 느낌이 들었다. 간신히 고개를 돌려보니 그였다. 


내가 손을 놓았고 자리에 앉았던 그는 내 가방을 무릎에 놓았다. 그보다 나는 네 정거장 더 가야 했고, 그가 내릴 때쯤 반 이상의 학생이 내린 후일 테니까 걱정 없었다. 버스가 설 때마다 사람들이 내렸고 그날따라 멀리까지 가는 학생이 많지 않았다. 그가 내리기 두 정거장 전에 그의 옆자리가 비었다. 그가 일어나 내 가방을 창가 쪽으로 놓았다. 거기 앉으라고 눈짓하며. 앉지 않았다. 나는 새침데기였으니까. 고맙다는 표시도 하지 않았다. 


그는 마을 앞 정류장에서 내렸고 나는 비어 있는 의자에 앉았다. 그가 앉았던 온기가 남은 자리에. 기분이 묘했다. 약간 친밀감 같은 느낌 같은 거였다. 그 후부터 아침에 그의 가방을 들어주게 되었던 것 같다. 정확히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다. 매일 한 번 또는 두 번씩 마주치게 되는 그와 가벼운 눈인사 정도 나눌 수 있게 되었을 때였는지. 그때쯤 그는 벌써 고2였다. 나는 중3이었고. 말을 해본 적은 없다. 


고등학교 진학을 놓고 어머니와 옥신각신할 때였다. 동생들이 둘이나 그것도 중학교 1학년인 남동생이 바로 아래 있어, 진학을 못 시켜준다는 어머니가 그렇게 야속할 수 없었다. 아직 철이 덜 든 나였으니까. 말이 더욱 없어지고 우울감은 심해졌다. 그와 마주쳐도 눈인사를 건넬 겨를이 없을 정도로. 그만큼 아무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학교에 남아서 되지 않는 입시공부를 하고, 늦게 집으로 돌아가던 날이었다. 버스 안에 빈 좌석은 없었다. 그가 좌석에 앉아 있었고 버스에 오르는 나를 보고 가방을 들어주었다. 눈인사도 없이 가방을 그에게 맡기고, 나는 누렇게 변해가는 가을 들판을 쳐다보았다. 세상과 버스에 한없이 들리는 몸을, 버스 손잡이에 의지하고. 울고 싶은 심정이었던 것 같다. 그가 버스에서 내린 것도 몰랐다. 어둑해지는 바깥 풍경에 정신을 차렸을 때, 빈 의자에 내 가방만 덩그렇게 놓여 있었다. 


집에 와서 가방을 열었다. 가방 안에 편지가 들어 있었다. 꽃 편지지에 반듯하게 쓰인 글의 내용은, 무슨 일이 있느냐, 우울해 보인다, 쌀쌀하게 대하는 이유가 궁금하다 정도였다. 꽃 편지지였으나 흔히 말하는 연애편지는 아니었다. 그저 그를 대하는 나의 태도에 대한 물음이었다. 쌀쌀하게 대하는 것으로 인식한 것은 아마 눈인사도 건네지 않는 것에 대한 그의 주관적 판단이었으리라. 


그 후 그를 본 적 없다. 그는 버스에 타지 않았다. 편지 말미에 적혔던 대학 입시를 위해 학교 근처 친척집에서 지내게 될 거라는 내용이 집 주소와 함께 적혀 있긴 했으나, 나는 편지를 보내지 않았다. 우리 학교 건너 그가 다니는 고등학교 앞을 지날 때, 유심히 쳐다본 적이 한두 번 있었을까. 혹시 그가 보일까 싶어서. 모르겠다. 우울한 가운데 나는 중학교를 졸업했고, 그는 고3이 되었으리라. 


그 길을 우연찮게 지나면서 처음으로 불쑥 떠오른 그. 그도 어디서 나처럼 나이 들어가고 있겠지. 단발머리 음울한 모습의 여중생 모습은 까맣게 잊은 채. 아마 퇴직 후 저 고향 마을에 들어가 살고 있을지 모르겠다. 그가 나의 답장을 기다렸을까. 주소가 적힌 것을 보면 확실하다는 생각이다. 내가 그의 마을 앞 버스정류장을 무심히 지날 수 없었던 것은 순수했던 날들에 대한 그리움 외에 다른 것은 없다. 확연히 떠오르는 그의 얼굴이 남편의 얼굴과 흡사하다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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