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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명숙 Feb 03. 2023

아무도 모르게 한 이상한 짓, 넷

치유

 

글쓰기를 아무도 모르게 한 게 맞다. 이상한 짓은 아니지만. 그래서 제목을 쓸 때 망설였다. ‘타인에게 말 걸기’는 이상한 짓이라고 볼 수 있는데. 세계와 화해하는 방식의 하나인 ‘나’와의 화해는 ‘글쓰기’였으니까. 글쓰기가 이상한 것은 아니잖은가. 생각하기에 따라 숭고하고 아름다울 수 있는 작업인데, 그것을 이상한 짓이라 지칭하는 게 아무래도 거슬린다. 하지만 제목의 연계성을 본다면 그대로 쓰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 외에, 내가 힘듦을 이겨내기 위해 아무도 모르게 한 이상한 짓이 더 있다. 하지만 이것으로 구체적인 서술을 마친다. 맛있는 음식도 계속 먹으면 맛을 모르게 되는 것이며, 힘든 이야기도 계속 들으면 내성이 생겨 그러려니 하는 것이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쓰는 사람도, 읽는 사람도, 비슷한 류의 글은 지루하다. 독자들이 비슷비슷한 이야기를 계속 읽게 되면  아무리 좋은 작품이라 해도 지루하거나 감동이 감해진다. 내가 이쯤에서 아무도  모르게 한 짓을 ‘글쓰기’로 마무리 지으려는 이유다. 


가끔 제자들이 묻곤 했다. 같은 제재로 계속 쓰고 싶을 때 어떡하느냐고. 쓰라고, 소재가 다르면 괜찮다고 했다. 구체적인 예로 ‘투병기’ 같은 경우, 제재는 말 그대로 ‘병과 싸운 기록’ 아닌가. 하지만 소재와 주제가 다를 수 있다. 그래서 무방하다는 것이다. 때로는 샘을 퍼내고 퍼내야 새로운 새 물이 나오듯, 고여 있는 글쓰기 샘의 이야기를 쓰고 써서, 새로운 소재로 나아가야 할 때도 있다. 그 퍼내는 작업이 내적 상처를 치유하는 마중물이 될 수 있다. 이쯤에서 홍보(?)와 곁들여 예로들 적당한 책이 있다. 나의 산문집 『당신이 있어 따뜻했던 날들』이다. 이 책의 제재는 같지만 각각 다른 소재들로 썼다. 


가정의 우환은 삶의 질을 저하시킨다. 정신을 피폐하게 할 수도 있다. 정신 줄 단단히 잡지 않으면 가정은 순식간에 와르르 무너져 버리고 만다. 그전에 쌓아온 가족 간 애정의 결속 정도, 구성원이 갖고 있는 삶의 철학, 경제력 등이 영향을 끼칠 수 있으나 성인군자가 아닌 한 힘들 수밖에 없다. 거기다 설상가상으로 가족 외의 사람들로부터 받는 스트레스는 어쩌면 가정 내적인 문제보다 더 심각하다. 내가 이상한 짓을 했던 대부분의 것들이,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받은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해 발생한 것들이었다. 


내가 글을 쓰는 사람이라는 게 다행스러웠다. 아니, 그 정도였다면 글 쓰는 사람이 아니라도, 쓰게 되었을 것이다. 누구에게 말할 수 없고, 말하면 더 나쁘게 비약되는 그 현실을 어떻게 견딜 수 있단 말인가. 결국 믿을 수 있는 사람은 나와 내가 낳은 아이들뿐이었다. 내면에서 외치는 소리에 귀 기울여 썼고, 아픈 사람을 바라보는 안타까운 심정을 글로 표현했으며, 깨우치게 되는 것들과 힘들었던 과거의 이야기들을, 한 꼭지씩 쓰기 시작했다. 누구에게 말 못 할 솔직한 심정까지 가감하지 않고. 


그러다 마음이 내켜 긴 호흡으로 쓰고 싶을 때면, 예화를 바탕으로 허구화하여 단편 및 장편소설로 썼고, 소재에 따라 수필, 소설, 동화, 동시, 시로 썼다. 밥 먹듯이 글을 썼다. 완성도를 염두에 두지 않고, 일단 속에 있는 것들을 퍼냈다. 끄집어냈다. 과거, 현재, 미래까지 총 망라하여 쓰고 싶은 대로 썼다. 글감은 쓰고 써도 새롭게 생겨났다. 하루의 일상이 모두 달랐고, 생각하는 것 또한 다르며, 관점이 다르면 더욱 모든 게 새롭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밤에도 쓰고 새벽에도 썼으며, 간병하는 병실 의자에서 자고 생활하면서도 썼다. 외부 강의 나갈 때는 차 안에서도 썼다. 자투리 시간에는 메모를 했고 조금이라도 시간이 되면 망설이지 않고 컴퓨터를 열거나 창작노트를 꺼내 썼다. 그야말로 밥 먹고, 강의하고, 남편 보살피는 것 외에는 글을 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 때문이 아니면 사람들을 거의 만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일주일에 두세 편의 짧은 글이 완성되었고, 십여 년이 흐르는 동안 천여 편 가까운 글이 모였다. 물론 완성도는 떨어지지만. 


글을 쓰면서, 의도하지 않았는데 깊은 내면의 ‘나’를 만났다. 그러면서 나를 곧추세우게 되었고, 자존감을 되찾았으며, 어떤 비아냥도 무시할 수 있는 근육이 생겼다. 그런 중에 소설가로 등단하게 되었으며, 학위도 받았다. 논문을 쓰면서도 정서적 글쓰기를 놓지 않았다. 지도교수에게, 논문을 쓰는 거야 수필을 쓰는 거냐는 지적을 받았지만 병행했다. 그만큼 글쓰기 매력에 빠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게 아닐까. 글을 쓰면서 저절로 내면의 ‘나’를 만나게 된 것은 최고의 행운이었다. 


그렇게 쓴 글 중에서 60편 선별하여 첫 산문집 『오늘도, 나는 꿈을 꾼다』를 내게 되었다. 그 책을 묶고 퇴고하는 과정에서, 내가 지난한 삶을 견딜 수 있도록 내 의식의 바탕에 영향을 끼친 사람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래서 두 번째 산문집, 위에 거론한 『당신이 있어 따뜻했던 날들』을 쓰게 되었다. 이 책의 제재는 ‘삼촌’이다. 


『당신이 있어 따뜻했던 날들』을 쓰면서 기적이 일어났다. 청소년기에 겪었던 우울증의 원인을 발견했고, 지난한 삶을 견딜 수 있는 자양분의 원인을 알게 되었으며, 성장 환경의 중요성도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무엇보다 진정한 나를 만났고, 나를 깊이 이해했으며, 내면의 ‘나’와 화해하게 되었다. 불만스러웠고 이해할 수 없던 나의 행동과 생각들을 모두 이해하게 되었다. 진정한 나를 만나자, 내면 깊은 곳의 ‘나’와 자연스럽게 화해했다. 그것은 기적이고 행운이었다. 


내 삶과 의식은 달라졌다. 내가 만든 이상적 모습을 겉으로 표출하면서 살 수밖에 없었던 캐릭터에서 벗어나 진정한 나로 사람들 앞에 섰다. 그 모습은 놀랍게도 내가 겉으로 내세우던 그 모습과 쌍둥이처럼 닮아 있었다. 달라진 것은 외식이냐 진솔함이냐의 차이다. 부족하거나, 후회스럽거나, 실수를 했거나, 멋지거나, 마음에 들거나, 드러나거나, 드러나지 않거나, 이대로 모습의 나를 인정한다. 부족한 것들 후회되는 것들은 채우거나 수정하면 될 일이다. 이제 진정으로 자유로운 ‘나’가 되었다. 의식이나 행동이나 모든 면에서. 이것이 세계와의 화해 방식 중 하나인, 가장 중요한, ‘나’와 하는 화해로 얻은 결과다.


모두 글쓰기 덕분이다. 내가 글을 쓰지 않았다면, 지난한 그 시간들을 어떻게 견뎠을까. 사람마다 그 시간을 견디는 방법이 다 다를 것이다. 지금은 내가 겪은 지난날의 일들이 모두 내 삶을 반짝이게 하는 에피소드일 뿐이다. 내면을 단단하게 만들어 주었고, 그 단단한 근육으로 힘든 시간을 견디게 해 주었으며, 적어도 이렇게 글감이 되어주지 않는가 말이다. 태어나 겪은 모든 삶의 궤적들은 창작의 원동력이고 내 삶을 단단하게 만드는 자양분이다. 그러므로 내 삶의 모든 부분을 사랑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이렇게 나는 글을 쓰고 있다.   


p.s 의도치 않게 글의 서술 상 제 졸저를 거론하게 된 것을 민망하게 여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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