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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명숙 Feb 02. 2023

아무도 모르게 한 이상한 짓, 셋

치유

    

삶의 과정에서 만나는 모든 것들을 허투루 볼 일 아니다. 겪어낸 것들이 근육을 키우기 때문이다. 몸의 근육 못지않게 필요한 삶의 근육. 그것을 키우기 쉽지 않다. 부단히 자신과 싸워야 한다. 내면에서 일어나는 좌절, 자포자기와 같은 부정적 생각과 싸워 이겨야 한다. 가장 지키기 힘든 자기를 지켜야 한다. 그뿐인가. 지키고 난 후 세계와 화해해야 한다. 그럴 때 진정한 근육이 생성된다. 


자기를 지키는 것까지 하고 세계와 화해하지 않으면 진정한 삶의 근육을 생성하지 못한다. 자기를 지켜 어떤 부정적인 것에 휘둘리지 않게 되는 것만으로도 훌륭하다. 하지만 세계와의 화해로 승화되지 않으면 소통이 부재한 상태에 머무르고 만다. 어느 누구도 인정하지 않고 타인과 벽을 쌓아 근접하지 못하게 하며, 자기 생각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고집쟁이가 되는 것 같다. 


세계와 화해한다는 것은 첫째 ‘나’와 화해하는 것이며, 둘째 ‘타인’과 화해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가 될 때 진정 세계와 화해하는 것이며 이로써 삶이 근육이 생성된다. 나와 화해하는 방법이 어렵고 타인과 화해하는 것이 더 쉬운 것 같다. 타인과 하는 화해는 먼저 손 내밀거나 상대방이 손 내밀 때 잡으면 된다. 나와 하는 화해가 어려운 것은, 사람은 자기 연민에 빠지기 쉬워서다. 나도 그랬다. 


근육은 삶의 여정에서 부딪치게 되는 문제의 완충작용을 해준다. 나아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동력이 떨어지면 사람이나 기계나 멈추게 되듯, 삶의 근육이 부족하면 휘청대거나 의욕을 잃게 된다. 의욕이 떨어질 때마다 일으켜 세우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 방법은 나의 자존감을 되찾아 내가 누구인가에 대한 물음에 답하며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이었다. 쉽지 않았지만 꾸준히 반복하다 보니, 기본적인 근육을 키운 듯하다. 


그렇게 되기까지 해온 이상한 짓들은 궁여지책일 수 있고, 부끄러울 수 있다. 그래도 새로운 방법들을 찾아가며 나를 곧추세우기 위해 노력한 것은 나쁘지 않았다. 가장 기본적인 것은 꾸준히 학문의 세계에 발을 담그고 배움의 자세를 견지하면서, 제대로 사람이 되어보려 노력한 것이지만 가끔 그렇게 이상한 짓을 했다. 


그렇게 이상한 짓들이, 영화 ‘나는 네가 지난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처럼 끔찍한 일은 아니지만, 감추었던 나의 비밀한 것들을 드러내는 것이기에, 용기가 필요했다. 벌써 20여 년 전의 일들인데도. 물론 지금은 그때 받았던 상처가 추호도 남아있지 않다고 말할 수 없으나, 옹이로 남았을 뿐 앙금은 없다. 앙금이 남아 있다면 말하기 싫었을 것이다. 가족사를 거론하는 건 더욱. 항아리 속에 가라앉은 앙금을 휘저으면 부유하는 알갱이처럼 다시 떠올라 가슴을 아리게 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이제 모든 게 옹이가 되었다. 옹이는 단단하고 아름답다. 나무의 옹이는 아픔이지만 그것이 아물면 단단해진다. 나무를 잘라 목재로 만들었을 때, 옹이가 있는 부분이 가장 아름답다. 삶의 여정에서 만났던 그 아픔이 아물어 옹이가 되면 단단하고 아름답게 된다. 그 옹이가 삶의 근육이 아닐까. 아픔이지만 아물기만 하면 단단하고 아름다운. 숨겨져서 잘 보이지 않으나 헤집고 찾아보면 그 옹이 몇 개씩 발견할 수 있으리라. 크고 작은 차이가 있을지라도.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세계와 화해 두 가지 유형 중 하나인 ‘타인’과 화해 방법으로 택한 이상한 짓에 대한 것이다. 그건 ‘타인에게 말 걸기’다. 대인기피증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이기도 했다. 하루에 세 명 이상의 모르는 사람에게 말을 거는 게 목표였다. 어디서든 상관없이 세 명 이상과 3분 정도 대화를 나누기로 했다. 


쉽지 않았다. 거기다 아직 남아 있는 대인기피증이 방해 요소가 되었다. 강의는 생계유지 방편이므로 가장하고라도 웃으면서 할 수 있지만, 생면부지 사람에게 말을 걸고 대화를 한다는 게 그리 쉽겠는가. 그래도 시도했다. 산행을 하다가, 길을 가다가, 슈퍼에서 물건을 사다가, 공중목욕탕에서, 학교에서, 어디서든 만나게 되는 사람들을 살펴 대화를 시도했다. 


가장 쉬운 것은 학교에서였다. 내 강의를 듣지 않는 모르는 학생에게 대화를 시도해도 그들은 내가 선생이라는 것을 외관으로 앎으로 순순히 응해주었다. 문제는 대화 내용과 시간이었다. 3분이 짧은 것 같아도 의외로 길었다. 그것도 공감되는 화제가 아닐 때 더 길게 느낀다. 나중에는 2분으로 줄였다. 그냥 말만 걸어보는 건 별 의미가 없기 때문에 최소한 그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 생각했다. 


그렇게 한두 번 시도하면서 나는 달라졌다. 남에게 말을 걸면서 굳은 표정으로 한다면 누가 대꾸를 하겠는가. 자연히 표정이 밝아졌다. 어떤 주제로 말을 걸어볼까 고심하면서 상처 주었던 사람들을 잊었다. 길었던 그 2~3분의 시간을 짧게 느끼면서, 새로운 사람과 관계가 형성되기도 했다. ‘타인에게 말 걸기’는 본래의 밝고 명랑한 내 성격과 긍정적인 삶의 태도 역시 되찾게 했다. 


그러면서 근육은 더욱 단단하고 풍성하게 형성되었으며, 세계와 화해하는 유형 중 하나인 ‘타인’과 화해를 이룰 수 있었다. 누가 가르쳐 준 것은 아니다. 내가 고안해 낸 방법이었다. 나를 시험해 본 것이기도 했다. 자기를 시험하는 일은 배수진을 치는 것과 같을지 모른다. 그만큼 나는 절박했다. 그 절박함에 대한 인식도 사람마다 다 다르다. 아무튼 그러면서 나는 삶의 또 한 고비를 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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