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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명숙 Feb 01. 2023

아무도 모르게 한 이상한 짓, 둘

치유

    

대인기피증이 나를 바꿔놓았다. 트레이드마크가 웃음이었는데, 그것을 잃었다. 신경질적으로 바뀐 성격은 가족들에게 불안감을 조성했다. 표정 없는 얼굴로 하루하루를 건조하게 살고 있는 나. 가끔 거울을 보면 얼른 그 앞을 벗어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봐도 봐줄 수 없는 모습이었다. 친밀감이 장점이었는데, 그것도 사라졌다.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아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 그 안의 삶이 지속될 것 같아 두려움에 떨었다.

 

학교에 가서 학생들을 만나야 하는 일이 견딜 수 없이 모멸스러웠다. 학생들에게 위장된 모습으로 행복한 듯 강의를 했고, 그들 앞에서는 웃었으니까. 집으로 돌아올 때 차 안에서 그런 나의 이중성에 모멸감을 느꼈다. 어릿광대 같았고, 순수해 보이지 않았다. 바라던 꿈이었고, 어렵게 이루었으며, 사명감 갖고 임하던 일이었는데. 부질없게 생각되었다. 사람 만나는 게 그렇게 힘든 일인 줄 미처 몰랐다. 


사람 만나 강의하는 게 생계를 위해 하는 주업이었다. 하루에 많게는 10시간까지 그 일을 감당해야 했다. 그래야 아픈 남편 뒷바라지와 아이들 학비, 생활비 그리고 학위과정에 있는 나의 학비를 감당할 수 있었다. 그것이 강의로만 해결되지 않아 과외까지 해야 했다. 더 이상 빚 속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것이든 포기해야 할 상황이 되었지만 하나도 포기하지 않는 것이 남들에게는 무모한 일로 비쳤으리라.


모든 원인은 아픈 남편에게 있었다. 하지만 원망하지 않았다. 살면서 아프기도 하고 세상을 떠나기도 하는 것 아닌가. 아프지만 우리들 곁에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스러웠다. 아이들과 셋이 번갈아 간병하느라 우리 모두의 시간이 자유롭지 못했고, 남의 손을 빌릴 수 있을 만큼 우리는 경제적 여유가 없었다. 무엇보다, 소중한 사람을 남의 손에 맡기고 싶지 않았다. 그건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남들이 내게 말로 상처를 준 것의 원인은 거기에 있었다. 아픈 남편은 요양원에 보내라고 했고, 학업을 그만두라고 했으며, 아이들을 휴학시키라고 했다. 내가 힘들다고 말하지 않았으며, 그 가운데 웃으려고 노력했고, 내 일을 힘겹게 감당하고 있었는데. 나의 현실을 부정적으로만 보고 자기들 잣대로 내 삶을 재단하려 했다. 나의 모든 것들이 부정당해 진흙 속에 내팽개쳐 나뒹구는 것 같았다. 그 모멸감을 침을 뱉으며 견뎠다. 


누가 그들에게 그렇게 말할 권한을 주었을까. 맘대로 남의 인생을 재단하고 말할 권리를 누가 주었단 말인가. 도움을 요청한 적 없고, 도움을 준 적 없으며, 조언을 구한 적도 없는데. 그들의 말이 위로하느라 한 말이라고 할 때, 그건 위로가 아니고 상처라고, 그렇게 해석하는 건 ‘아전인수’고 ‘언어도단’이라고, 외쳤다. 내게 대인기피증이 생긴 건 그즈음이었다. 침을 뱉기 시작한 것도. 


소중한 가족의 한 사람이 남들로부터 그런 하찮은 취급을 받고 있다는 게 견딜 수 없었다. 아프면 무조건 격리되어야 하나. 가까스로 가족들의 사랑과 보살핌으로 생명을 이어가고 있는 사람을 시설로 보내라고 누가 맘대로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결정은 우리가 할 일인데. 최소한의 예의도 없는 그들과 더 이상 소통하고 싶지 않았다. 그건 나의 자존감이면서 최소한 나를 지키는 방법이기도 했다. 


우리 가족은 더욱 똘똘 뭉쳤다. 딸은 학교 다니며 집안일과 남편 간병에 조력했고, 아들은 학업과 입시학원 강의를 병행해 학비를 벌었으며, 나는 전적으로 모든 가정경제를 책임지고 힘든 삶의 골짜기를 건너가고 있었다. 남편의 병세가 호전되면 행복했고 희망이 생겼으며, 나빠지면 안타까워 몸부림쳤다. 우리 가족의 위기는 그때였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었다. 위기는 위기가 아니었다. 우리는 더욱 뭉쳐 서로 도왔고 위로했으며 가족의 소중함을 인식했다. 우리는 보통 때보다 더 행복했다. 그것은 틀림없다. 지금도 우리는 만나기만 하면 그때 이야기를 한다. 가족이 가장 힘이 되는 존재이고, 가족이 가장 소중하며, 가족이 뭉치기만 하면 어떤 어려움도 넘어설 수 있다는 이야기를. 배후에는 우리가 믿는 신앙이 크게 작용했다는 것도. 


서론이 너무 길었다. 대인기피증이 올 정도로 말로 상처받았다는 것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다. 사람관계에서 이해는 쉽지 않다. 같은 상황을 겪어도 그것을 바라보는 시각이 모두 다르고, 해석하는 것도 다르기 때문에, 전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함부로 말해서도 안 된다. 내가 겪어봐서 하는 말이라는 것도 맞지 않다. 해석이 다 다르니까. 그 모든 것을 감안할 때, 웃음을 되찾는 것만이 내게 급선무였다. 그래야 맡은 일을 잘 감당할 수 있을 테니까.


근처 동사무소에 웃음치료사가 와서 특강을 하기에 참석했다. ‘웃음스티커’ 다섯 장을 받았다. 그 스티커를 침대, 식탁, 책상, 소파, 냉장고에 붙였다. 그 스티커에 내 손이나 몸이 닿기만 하면 정신없이 소리 내어 웃었다. 나오지 않는 웃음일지라도 그냥 웃었다. 누가 본다면 미쳤다고 할 정도로. 식구들에게도 권했지만 아무도 하지 않았고, 오직 나만 했다. 내가 하는 이상한 짓을 가족들은 알았으니, 아무도 모르게 한 짓이라고 일컫는 것은 맞지 않으나, 남들은 모르는 것이므로 목록에 넣기로 했다. 


행복해서 웃는 것이 아니라, 웃기 때문에 행복해지는 것이 맞다. 나는 차츰 진정으로 웃기 시작했고, 대인기피증도 조금씩 나아졌다. 어쩌다 한 번씩 모임에 나갔고, 사람들의 말에 상처받는 것도 덜해졌다. 완전하지 않았지만. ‘웃음스티커’는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웃다 보면 눈물이 나고, 가슴이 후련해졌다. 내가 웃으니 집안 분위기도 다시 밝아졌다. 아내가 왜 ‘안해’인지 알 것 같았다.  


웃음스티커, 엊그제 물품 정리하다 보니, 하나가 나왔다. 이제 그것이 내게 필요 없다. 웃음은 다시 나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지 오래니까. 내가 만든 건강빵까지 웃는 모습으로 보일 정도로 웃음과 나는 유기적 관계에 있다. 웃음을 되찾고 웃다 보니 힘든 삶의 골짜기도 너끈히 건너왔다. 활짝 웃는 웃음스티커를 처음 받을 때, 믿지 않았지만 붙여 놓고 정신없이 웃다 보니, 달아나던 웃음이 돌아온 게 아닐까. 이젠 그 웃음을 꼭 붙잡고 놓지 않으리라. 아니, 이미 나와 웃음은 하나가 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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