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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명숙 Jan 31. 2023

아무도 모르게 한 이상한 짓, 하나

치유

  

나는 음험하다. 솔직하기를 추구하지만 음험하기 짝이 없다. 남모르게 한 이상한 짓이 있기 때문이다. 그 이상한 짓들 가운데 하나를 발설하리라. 비밀스럽고 은폐된 것, 그것을 발설해 보면 드러내지 못할 게 없을 테니까. 올해는 거침없이 쓰기로 작정했으니까. 문학은 어쩌면 그 비밀한 것의 민낯을 드러내는 작업인지 모르겠다. 아니, 인생이라는 바다 그 심연에 생각의 추를 드리우고 헤집으며 의미를 발견해 표현해 내는 것인지도. 그 음험함을 드러내는 것인지도. 그러함에 품위가 훼손되는 것도 염두에 두지 않으리라. 적어도 내 글을 읽는 독자들은 드러난 문장을 통해, 숨겨진 이면을 읽어내는 능력을 가졌으므로.  


그래도 혹시 노파심에 몇 마디 한다면, 절대 따라 하기 없기, 나를 이상하게 보기 없기. 그것이 가능한 독자만 읽으시길. 아니라면 패스하시길. 믿는다면서 이렇게 구구절절 이야기하는 걸 보면, 그만큼 드러내기 망설여진다는 의미리라. 아무래도 작가는 베일에 가린 듯 신비로운 게 나름대로 괜찮은데. 더구나 나는 여자 아닌가. 썩어도 준치라고 늙어도 여자는 여자다. 양성평등에 어긋나는 발언인가. 아, 요즘은 참 말하기 힘들다. 삼천포를 조심하라, 내면에서 외치는 소리.  


아무도 모르게 내가 한 이상한 짓 가운데 하나는, 놀라지 마시라. ‘침 세 번 뱉기’다. 물론 아무 때나 아무 데서나 하지 않았다. 특히 길에서는 금지다. 경범죄에 해당되므로. 사실, 그 행위는 이미지가 좋지 않다. 대개 불량한 사람들이 하는 짓 아닌가. 치아 사이로 칙 하면서 뱉는 건 더 불량스러워 보인다. 나처럼 교양인을 추구하면서 그 이상한 짓을 한다는 걸 누가 상상이나 할까. 별명도 다 누설했는데, 이상한 짓 한 것 드러낸다고 내 이미지가 더 바닥칠 건 아니다. 바닥 치는 걸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바닥까지 내려가면 올라올 일밖에 없기 때문에. 


그렇다고 공연히 그 짓을 한 것은 아니다. 내가 하는 어떤 행동에는 다 이유가 있다. 이유 없이 막무가내로 한다면 어디 아픈 사람일 거다. 적어도 내가 그렇게 ‘막돼먹은 명숙 씨’는 아니니까. 아, ‘막돼먹은 영애 씨’를 흉내 냈다. 사실 그 드라마에서도 영애 씨가 막돼먹은 것도 아니다. 오히려 정의롭고, 정직하고, 참을성 있고, 인정 많고, 명쾌한 사람이다. 그나저나 ‘막영애’ 시즌 시작 안 하나 모르겠다. 애타게 기다리는 내가 있는데. 


사람이 살다 보면 예기치 못한 힘든 일을 겪기도 한다. 그것이 너무 힘겨워 몸과 마음을 지탱할 수 없을 적도 있다. 안 겪고 산다면 그보다 더 다행한 일이 없을 테지만 인생지사 알 수 없는 일이 종종 일어난다는 걸 모르는 사람 없다. 나 역시 한 때 그렇게 힘든 날이 있었다. 많이 울었고, 웃음을 잃었으며, 삶을 끝내고 싶을 정도로 힘들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어느 누군들 그래본 적 없던가. 


그렇게 힘이 들 때 기적처럼 도와주는 사람이 있기도 하지만 어느 시기에는 깜깜절벽 같은 암담함을 혼자 감당해야 할 때도 있다. 심지어 상처에 소금 뿌리듯 더 아프고 힘든 일이 겹칠 때도 있다. 엎친 데 덮친 격, 설상가상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 아니다. 그게 인생 살면서 흔히 겪는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든 영화도 불행도 다 지나간다. 지나가는 게 또한 인생이다.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에, 내가 당한 불행을 함부로 판단하고 충고하며, 상처 주는 경우를 겪었다. 그 기간은 10여 년 가까이 되었다. 대인기피증에 걸릴 정도로 사람 만나는 게 두려웠다. 마음대로 판단하여 쏟아내는 말 때문이었다. 잔인하게 나의 불행을 즐기는 것처럼 들리는 말도 내뱉었다. 서슴없이. 자격지심이었을지 모르나 내게는 그렇게 들렸다. 그럴 때 내가 했던 행동이 ‘침 세 번 뱉기’였다. 소심하지만 그렇게라도 해야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영조는 싫은 소리를 들으면 귀를 씻었다. 옛사람 허유도 요임금이 왕위를 준다니까 더러운 말 들었다고 귀를 씻었다. 나는 귀를 씻기 번거로우니 침을 뱉었다. 세 번. 왜 세 번일까. 한 번은 시원찮았고 두 번도 미진했다. 세 번이면 후련했다. 웃지 마시길, 삼 세 번 때문은 아니니까. 그만큼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나의 형편과 사정을 알지 못하면서 마음대로 판단하고 조언하는 데 견딜 수 없었다. 


그때부터 내가 조심한 것이 ‘말’이다. 말처럼 무서운 게 없다. 누가 묻기 전에 말하지 않았고, 조언을 구하기 전에 방법을 제시하지 않았다. 내가 하는 말이 상대방에게 상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웬만해서 먼저 방법을 제시하지 않았다. 특히 말을 부정적으로 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부정적인 상황이라도 에둘러서 하는 쪽을 택한다. 비겁해서 아니다. 상처가 될까 봐서다. 


지금은 ‘침 세 번 뱉기’를 하지 않는다. 오래전에 그만두었다. 그 이상한 짓을 1년 정도 했던 것 같다. 상처를 받으면서도 나를 곧추세우려 애썼고, 조금씩 생긴 삶의 근육으로 사람들의 말과 시선에 휘둘리지 않게 되었으며, 끝내 극복했다. 내게 해당되지 않는 말을 무시하거나 적극적으로 대거리하며 사람에 대한 이해 방식을 바꾸었다. 그 과정에서 내가 나를 얼마나 믿고 다독였는지 모른다. 또 선한 영향력으로 내게 힘을 주던 사람들을 기억하며, 사람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기 시작했다. 결국 내가 나를 믿음으로써 극복할 수 있었다. 


나를 믿을 수 있게 된 것은 그 선한 영향력을 준 사람들 덕분이었다. 사람은 상처를 주지만 힘도 준다. 사람에게 입은 상처는 사람으로 치유될 수 있다. 나를 믿어주고 응원해 주는 사람들을 통해, 내가 어려움을 헤쳐 나갈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고, 결국 나에 대한 신뢰를 회복했다. 무엇보다 내 삶의 바탕에 있는 신앙이 도움이 되었다. 


이렇게 나는 음험한 짓을 저질렀다. 남의 것을 도둑질하지 않았고, 나쁜 짓을 하지 않았지만 은밀하게 숨어서 한 짓이다. 등산하면서 산자락 어딘가에 침을 뱉었고, 화장실에 침을 뱉었으며, 여의치 않으면 마음으로 침을 뱉었다. 그러면서 속에서 끓어오르는 울분을 뱉어냈다. 부당한 말, 상처되는 말을 한 사람에게 뱉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그런 말을 듣는 내 상황이 힘들어한 짓이었다. 


솔직함을 추구하면서도 음험하기 그지없는 짓을 저지른 날이, 내게 있었다. 글을 마무리할 때가 되니 또 눈물이 괸다. 아, 나는 ‘울숙’이가 맞다. 자기 연민에 빠져 이 새벽에 눈물 또르르 흘리다니.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이상하고 민망한 짓이었는데, 그게 내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이었다니, 우습긴 우습다. 그래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지난한 삶의 골짜기를 건너온 나를, 나는 사랑한다. 내 슬픔과 아픔과 괴로움을 나처럼 아는 이는 없으니까. 내가 나를 사랑한다. 나르시시스트라 손가락질 받을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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