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작은 입으로
처음엔 못 알아들었다. 다섯 살짜리 온이 입에서 ‘작두콩 차’라니. 그 말이 나올 거란 생각을 누가 할 수 있을까. 고 작은 입에서, 작두콩 차 드실래요? 했을 때, 못 알아듣고 뭐라고? 무슨 차? 했다. 다섯 살짜리 외손자 온이는 작, 두, 콩, 차! 하면서 또박또박 끊어서 다시 말했다. 나도 모르게 박장대소했다. 어떻게 작두콩차를 아느냐며 호들갑 떨었다. 그 모습을 온이는 뜨악한 표정으로 보다가 하얀 이를 드러내고 생긋 웃었다.
요즘 온이에게 비염증세가 있는데 한의원에서 작두콩차가 좋대서 먹이고 있단다. 그러니 알고 보면 별로 대단할 것도 없는 일이다. 호기심 폭증하고 있는 온이가 무슨 차냐고 물었을 테고, 딸은 작두콩차라고 말해줬을 테니까. 나도 모르는 작두콩차를 알았다고 호들갑 떨 이유가 없는데, 뜻밖의 차 이름이 나오니 신기했다.
딸네 가면 온이와 함께 하는 과제가 몇 있다. 책 읽기, 옛날이야기하기, 산책하기, 네모빵 사러 가기다. 하나라도 덜 했는데 집에 가겠다고 일어나면, 온이가 허락하지 않는다. 이것도 안 했고 저것도 안 했는데, 왜 가느냐고 따진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다시 주저앉고 말 때가 있다. 우기고 가면 내가 딸에게 전화해서 바꿔달라고 하면 안 받고, 받아도 ‘우끼 께게’ 원숭이 울음소리를 내고 끊는다. 다시 신뢰를 회복하려면 보통 정성이 드는 게 아니다. 그래서 웬만하면 과제를 완수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책 읽기’할 때 동화 구연 하듯 책을 읽어준다. 오래전에 유아교육 기관을 설립해 운영할 때 쌓은 실력을 발휘한다. 유아교사로 돌아가는 시간이기도 하고. 그 후 내용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나눈다. 나는 독서지도사가 된다. 처음엔 줄거리 파악을 위한 질문 몇 개 하고, 다음엔 등장인물의 역할을 중심으로 이야기 나누고, 마지막으로 느낀 점을 말하게 한다. 때로는 그림을 보면서 온이에게 이야기를 구성하게 한다. 다섯 살짜리 정도가 할 수 있는 정도만. 과장된 반응을 하면서 듣는 건 필수다.
‘옛날이야기’는 동화에서 읽은 걸 해주거나 성경이야기 또는 옛날 옛적에 우리 할머니에게 들은 진정한 의미의 옛날이야기를 해준다. 온이는 눈을 반짝이며 귀 기울여 듣는다. 간혹 딸네서 자게 될 때, 옛날이야기는 온이가 내 옆에 자려고 하는 이유가 된다. 자꾸 해달라고 하면 간혹 꾸며서 해주거나 내가 쓴 동화를 들려준다. 하도 들려줘서 이제 서두만 시작해도 할머니 이야기죠? 한다. 그러다 잠이 든다.
‘산책하기’는 이야기 못지않게 온이가 좋아하는 거다. 아장아장 걸을 때부터 시작된 산책 시간은 나와 온이 둘만 오붓하게 지내는 시간이다. 걸으며 풀이름 나무이름 꽃이름 등을 가르쳐주고, 이야기도 나눈다. 지난여름에는 공원에 있는 강아지풀을 보고 어? 강아지풀이네 해서 깜짝 놀랐다. 강아지풀을 아느냐고 물었더니 어린이집에서 배웠단다. 내가 풀이름을 가르쳐주곤 했더니 관심이 생긴 걸까.
지난번에 산책 나갔을 때, 온이는 하늘을 가리키며 달이 떴어요, 예쁜 달이 떴어요, 하기에 보니, 하얀 낮달이 졸린 눈을 비비며 떠 있었다. 온이는 내 손을 잡고 달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달이 우리랑 같이 가고 싶은가 봐요, 자꾸 따라와요, 라며. 온이도 나처럼 달에 관심이 많다. 며칠 전에 어린이집에서 하원하며 전화했을 때도 말했다. 지금 예쁜 달이 엄마 차를 따라와요,라고. 산책할 때 본 그 달이 생각난 것 같았다.
산책하다가 우리가 자주 가는 빵집에 가서 네모 모양의 빵을 한 봉지 산다. 그 ‘네모빵’을 온이와 둘째가 아침에 우유와 함께 먹는다. 생크림이 든 빵도, 견과가 든 맛있는 빵도, 온이는 원치 않는다. 버터만 약간 들어가 고소하지만 달지 않고 오히려 담백한 맛이 있는 아주 평범한 빵, 네모빵만 좋아한다. 빵 이름도 온이가 붙였다. 모양을 보고 네모빵이라고. 가격은 2,500원이다.
그렇게 네 가지 과제를 다 하고 나서 집에 간다고 하면, 더 있다 가라면서도 삐치지 않는다. 깜깜한데 넘어지지 않게 조심하세요, 한다. 안 그러면 삐쳐서 가는 것도 안 보고 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깜깜하니까 내일 해 뜨면 가요, 또는 우리 이건 안 했잖아요, 할 때는 삐치지 않은 건데, 방으로 쑥 들어가 버리면 삐친 거다. 내가 아무리 달래고 안아주며 뽀뽀하려고 해도 뻗대며 안 하고, 온몸을 공벌레처럼 도르르 말고 고개를 숙인 채 쳐다보지 않는다.
원하는 것을 다 했는데도 내가 가지 않으면 뛸 듯이 좋아한다. 애교 가득한 말투로, 차 드실래요? 치즈 드릴까요? 우리 클레이 할까요? 하면서, 내 옆에 꼭 붙어 있다. 그때 나온 게 작두콩차다. 작두콩차라는 이름이 정확하지 않은 발음으로 작은 입을 통해 나오니까 어찌나 신기하고 귀여운지. 내가 박장대소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온이는 싱긋 웃기만 한다. 나보다 더 유식하다고 했더니 무슨 말인지 몰라 또 웃는다. 작고 하얀 이를 드러내고.
손주 이야기하면 우스갯소리로 십만 원 내라고 한단다. 나는 사람들 앞에서 웬만하면 안 한다. 근황을 물어야 이야기한다. 십만 원 내기 싫어서는 아니다. 하지만 글이니까, 글감으로야 쓸 수 있지 않을까. 이양하 선생의 <경이, 건이>도 있잖은가. 학창 시절 국어교과서에도 실렸던. 아, 그 작품의 경이와 건이는 손자가 아니고 동료며 동무의 아이들이기는 하다. 경수필이 보통 신변잡기적이며 생활 속 모든 이야기가 글감이 되므로 써도 무방하다고 본다.
며칠 전 온이네 어린이집에서 발표회 한다고 딸이 초대장을 보냈다. 흔쾌히 간다고 했다. 바로 오늘이다. 오후에 열일 제쳐놓고 갈 거다. 내 손주든 남의 손주든 아이들의 재롱이 얼마나 귀여울까. 가슴이 설렌다. 아이들 자라는 모든 모습이 신기하기만 하다. 내 자식들도 저런 적이 있었을까. 내 자식 키울 때 못 느낀, 예전엔 미처 몰랐던 재미를, 나는 요즘 느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