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이 어린이집의 발표회는 일명 ‘재롱잔치’다. 예전에 유아교육기관을 운영할 때, 나도 원에서 해마다 하던 행사다. 짬짬이 춤, 율동, 노래, 연극까지 다채롭게 준비해서 크리스마스 전후로 발표회를 했다. 그때 어린이들이 입을 의상을 대여업체에서 빌리거나 교사들과 함께 만들었다. 밤늦게까지 무대를 꾸미고 의상을 준비하며 얼마나 설렜던가. 아이디어를 짜내어 회의하고, 힘든 줄도 모르고 준비에 몰입했던 날들이었다. 그 재롱잔치를 몇십 년이 지나 보게 되다니, 외손자에게서. 감회가 새로웠다.
딸은 늦게 결혼했다. 내 속을 얼마나 태웠는지 모른다. 맞선을 수십 번도 더 봤지만 이루어지지 않았다. 딸은 결혼을 원했고 나도 그랬다. 과년한 딸을 둔 어미의 마음은 매일매일 타들어갔다. 기도하고 또 기도하면서 혼처를 구했지만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결혼이 필수가 아니고 선택이라고 해도, 내 생각에는 필수라는 생각이 강했다. 다행히 서른여섯 살에 결혼했고 그해 막바지에 온이를 낳았다. 삼 년 후 둘째까지 낳았다. 그러니 온이의 재롱잔치는 감회가 새로울 수밖에 없다. 더구나 오래전 해마다 준비하던 경험이 떠올랐으므로.
저녁 6시부터 열릴 재롱잔치에 가기 위해, 오후에 딸네 집으로 갔다. 딸은 온이를 기쁘게 해 주기 위한 사탕목걸이 만들 재료를 사다 놓은 채 기다리고 있었다. 옛날 솜씨가 남았을지 모르지만 내가 맡기로 했다. 딸은 둘째를 데리러 어린이집으로 갔다. 둘째는 영아라서 이번 재롱잔치 순서에 들지 못했다. 사탕을 색깔별로 잇고 이은 곳을 리본으로 장식했다. 목걸이 두 개를 다 만들었을 때, 딸이 돌아왔다. 둘째에게 오자마자 사탕목걸이를 걸어주니 입이 헤벌쭉 벌어졌다.
시간이 되어 우리는 발표회 장소로 향했다. 집에서 자동차로 10분 정도 걸리는 곳이었다. 장소를 대여한 모양이다. 나는 원에서 했다. 우리는 원이 넓은 데다 교실의 칸막이를 다 떼어내면 강당이 되는 구조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교실 두 개를 대기실과 옷 갈아입히는 장소로 썼었다. 지금도 눈에 선한 우리 원. 이젠 재개발로 흔적 없이 사라졌다. 사진과 내 기억 속에만 선명하게 남아 있는 곳. 딸의 이름을 원명으로 사용했었는데. 옛날 생각이 자꾸 났다.
도착하니 잔치 분위기였다. 장소 입구에는 현수막이 붙었고, 풍선아트로 장식돼 있었다. 원아 가족들이 환한 표정으로 삼삼오오 들어와 관람석에 앉았다. 할머니들도 더러 눈에 띄었지만 대부분 젊은 사람들이었다. 예전 우리 원에서 재롱잔치 할 때는 할머니들이 많이 참석했다. 그때만 해도 함께 사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일까. 지금은 그렇지 않아서인지, 별로 눈에 띄지 않아 의아했다. 원아 한 명 당, 세 명씩만 참석 가능했기 때문에, 이모나 삼촌들이 많이 왔을지도 모를 일이다.
사위는 시작하기 직전에 왔다. 셋이 나란히 관람석에 앉았다. 약식으로 국민의례를 한 후 바로 진행되었다. 아, 깜짝 놀랄 일이 생겼다. 첫 순서는 ‘위대한 어머니 상’ 수상이었다. 명칭이 거창해서 관심이 갔다. 그 상은 달리 위대한 게 아니었다. 코로나 시국에 둘째를 낳은 어머니들에게 주는 상이었다. 딸의 이름이 제일 먼저 불렸고 세 명의 이름이 더 불렸다. 단상으로 올라가는 딸은 당혹스러운 표정이었다. 나는 왜 그런지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코로나 시국에 대학교 교직원으로 재취업한 첫날, 둘째 가졌다는 걸 알게 되었다. 직장을 그만두어야 하나 어쩌나 고민할 때, 학교 측의 배려로 무사히 출산했다. 하지만 갓난쟁이를 키우며 직장에 다닐 수 없어, 부득이 둘째를 지방에 계신 친할머니가 8개월 동안 키워 주셨다. 아기를 떼어놓고 딸은 깊은 우울감에 시달렸다. 하도 힘들면 한 번씩 내려가 보고 왔지만 백일도 안 된 아기를 떼어놓은 어미 심정이 오죽했으랴. 내가 봐줄 형편이 되지 못하니, 마음만 탔었다. 그런 딸이 ‘위대한 어머니 상’을 받으니, 그게 무슨 공신력 있는 대단한 상은 아니지만 의미가 있는 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이집 원장의 발상이 신선하고 따뜻하다.
온이는 세 번 출연했다. 처음엔 ‘악기 합주’에서 북을 쳤다. 정확하게 다다다닥 북을 두들기는 모습이 제법이었다. 본래 리듬감이 아기 때부터 있던 아이이니 틀릴까 봐 걱정되지 않았다. 틀리면 더 재밌는 게 바로 재롱잔치이기도 했다. 또 한 번은 멋진 반짝이 옷을 입고 나와 노래에 맞춰 ‘춤’을 추었다. 온이는 나오면서 우리가 있는 쪽을 향해 손을 흔들며 생긋 웃었다. 무대체질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긴장하지 않고 자연스러웠다. 물론 춤도 잘 추었다. 마지막은 ‘합창’이었다. 참가한 모든 어린이들이 출연했다. 우리 온이만 눈에 띄었다. 다른 아이들이 하는 것을 하나도 못 보았다.
두 시간에 걸친 발표회는 순식간에 끝이 났다. 못하는 아이는 못해서, 잘하는 아이는 잘해서, 다 귀엽고 예쁘다. 가만히 서 있는 아이도 있고 한쪽 구석에 앉아 아무 동작도 안 하는 아이도 있었다. 교사가 아무리 이끌어도 가만히 구석에만 앉아 있는 모습이 귀여워 학부모들은 더 박수를 쳤다. 관중이 관람석에 가득 차 있는 무대에 섰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것 아닌가. 그 무대는 그 아이의 무대니까, 어떻게 하든지 그 아이가 주인공이다. 나의 인생이라는 무대에서는 내가 주인공이듯.
발표회가 순식간에 끝나듯 우리 인생도 그런 것 같다. 준비하는 기간은 길었을 것이다. 전에 나는 2학기가 시작됨과 동시에 한 작품씩 짬짬이 준비를 했다. 짧은 시간에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게 준비해서 두 시간 정도에 발표회를 마치면 무척 허탈한 기분에 휩싸이곤 했다. 많은 시간과 노력 그리고 아이디어를 동원해 준비한 것이 순식간에 끝난다는 것 때문이었다. 온이의 재롱잔치를 보고 난 후의 느낌도 비슷했다. 환호를 받으며 무대에 올라 공연한 시간은 한 작품이 대략 3분 전후였다. 그런 시간들이 다 모여도 두 시간 정도다.
사탕목걸이를 온이 목에 걸어주었다. 우와! 탄성을 지르며 좋아한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주차장으로 갈 때 온이를 업었다. 다 큰 형아가 업다니, 흉본다고 딸이 만류했다. 아니야, 힘들어요. 오래 기다렸고, 많이 걸었어요. 내 등에 업힌 온이가 내 목을 두 팔로 휘감아 잡으며 말했다. 온이는 기분이 좋은지 발표할 때 추었던 춤곡을 흥얼댔다. 순서를 기다리는 것은 지루했을 테고, 무대에서 춤추는 건, 많이 걸었다고 느낄 만큼 힘들었을 거다. 그 과정을 모두 완수한 온이는 홀가분한 기분일 거다. 그걸 나는 잘 안다. 그래서 업어주었던 거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었다.
온아, 참 잘했어. 재밌었어, 고마워. 사랑해. 내 말에 온이는 내 목을 더욱 끌어안았다. 흥얼거리는 노랫소리도 더 커졌다. 행복한 밤이다. 어느 배우가 말한 것처럼, 아름다운 밤이다. 우리 인생이 이렇게 아름답고 행복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