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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에서 보낸 하루

현과 영이 함께한 날

by 최명숙


갑자기 고향에 갈 일이 생겼다. 토요일인데 머뭇대다간 교통체증에 걸릴 것 같아, 다른 일을 다 접어두고 길을 나섰다. 아침 8시 30분. 신갈쯤 갔을 때, 예상대로 도로에 차가 가득 찼다. 거북이걸음이다. 한겨울 이 아침에 모두 어디를 가는 걸까. 현대인들 참 바쁘게 산다.


차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 서리다! 얼마 만에 보는 서리인가. 둔덕 풀 섶에 하얗게 서려 있는 서리가 잔잔한 안개꽃처럼 보였다. 가만 보니 논바닥에도, 응달진 산자락 나무 위에도, 하얗게 또는 희끄무레하게 서리가 앉아 있다. 곱다. 차가 밀리는 것도 불만스럽지 않다. 저 서리를 보노라니.


이맘때 아침, 고향에는 초가지붕에, 담장 위에, 안마당에 저렇듯 하얗게 서리가 내렸다. 등굣길 옆 논바닥에 하얀 서리는 추운 느낌을 가중시켰다. 잔뜩 웅크린 채 학교 가며 본, 마른 코스모스 대궁은 스산하기 그지없었다. 그렇게 겨울이 성큼 다가왔고, 추운 겨울은 길고 길었다.


옛 생각에 잠기어 천천히 운전했다. 한참 후 정체가 풀렸다. 경험한 배경지식을 바탕으로, 어떤 사물이나 현상을 보고 생각하게 된다. 그건 당연한 일이다. 무엇이든 그렇게 해석하게 마련이니까. 그래서 향토성 짙은 무엇을 보면 옛 생각에 잠기는 것 같다. 물질적 결핍이 많았던 옛날이 지금은 왜 이다지 풍요로운 기억으로 미화되어 떠오르는지. 아마 정신적으로는 만족했었기 때문일 게다. 사랑으로, 가족공동체의 결속력으로.


목적지에 도착해 일을 마치고, ‘현’과 ‘영’ 두 친구와 영의 고향집으로 향했다. 영은 퇴직한 후, 퇴락한 옛집을 헐고 어머니께 새로 집을 지어드렸단다. 지금은 홀로 계시던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비어 있는 고향집에 한 번씩 드나들며 관리하고 있다고 했다. 이제 그것도 번거로워 팔고 싶은데, 마땅한 작자가 없어 고민 중이란다. 마침 닭 모이 주고, 계란도 수거해야 하니까 가보잔다. 현과 나는 흔쾌히 따라나섰다.


오면서 봤던 하얀 서리, 논밭, 산자락 등이 나를 그렇게 이끌었다. 사실 급히 할 일이 있어 바로 올라올 예정이었는데, 서리 때문에 내 마음이 바뀌었다. 시골 마을을 보고 싶었다. 우리 고향집 못미처에 그 친구네 고향집이 있었다. 깔끔하게 지어진 단층집, 안마당에 깔린 잔디, 자그마한 텃밭, 뒤란에 두 개의 닭장. 청란을 낳는다는 닭과 토종닭을 따로 키웠다. 닭소리를 들으니 시골에 온 것 같았다.


마을을 살펴보니 이제 시골도 아니고 도시도 아닌 생경한 곳이 되어버렸다. 그 마을 옆에 연이네 동네가 있었다. 마침 연이 이야기를 한 편 쓴 끝인데, 갑자기 그곳에 가게 되니 꿈속에서 일어난 일처럼 기분이 묘했다. 멀리 연이네 집 들어가는 골목이 보였다. 함께 손잡고 놀던 마을 앞마당도. 그러나 그 옆에 있는 집들은 모두 달라졌다. 헐고 새로 지은 집도 있지만 개량한 집이 대부분이었다.


걷고 싶었다. 시골길을. 영은 닭 모이를 주고 집안을 정리한다며 남고, 현과 나는 산책을 나섰다. 마을 어귀에 느티나무는 여전했다. 아니 더 큰 것 같다. 수령을 보니 470년이 되었다. 느티나무 앞을 지나 걸었다. 근처 송강 정철 선생의 사당을 향해. 초등학교 시절 소풍 장소였다. 예전에는 산길이었는데, 지금은 아스팔트가 깔렸다. 차는 별로 다니지 않았다.


어릴 적에 현은 나와 옆집에 살았다. 울타리를 사이에 두고 두 집은 동기간처럼. 특별한 음식을 하면 울타리 너머로 불러 건네주고, 때로는 하나 나 있는 개구멍으로 드나들었다. 현이 말했다. 자기는 하도 숫기가 없어, 내가 옆집에 산다는 건 알아도 말 한 번 붙여 본 적 없다고. 그건 맞다. 나 역시 한 학급에서 공부해도 서로 본체만체했으니까. 그러다 친해진 건, 현이 군대 갈 무렵이었던 것 같다. 나도 마침 객지 생활에 지쳐 집에 와 있었기 때문에, 서로의 고민을 이야기하면서.


현에게 서리 이야기를 했다. 안개꽃 같더라고. 현은 안개꽃이 어떻게 생겼냐고 한다. 웃고 말았다. 현은 이 나이에도 그런 감성을 잃지 않으니 문학을 하는 것 같다며, 자기는 그런 저런 감성이 전혀 없다고 한다. 하지만 내가 아는 현도 상당히 문학적 감성을 가진 친구였다. 지금이라고 달라졌을 것 같지 않았다.


입구에 있는 기념관에 들어섰다. 송강의 시가 서예가들의 글씨로 게시되어 있다. 시를 본 현이 몇 수 줄줄 외웠다. 내가 빙그레 미소 지으니, 현은 쑥스러운 듯 제대로 안 된다며 웃었다. 관동별곡과 사미인곡, 성산별곡, 훈민가 등을 읽으며, 송강의 시 세계에 잠시 빠졌다. 현도 감성을 잃지 않고 있었다. 사당에 올라가 묵념하고 내려오며 앞에 펼쳐진 풍경을 보았다. 송강 선생이 흐뭇해하실 것 같은 풍광이었다.


영은 깨끗이 씻은 신선한 달걀을 판에 담아주었다. 직접 기른 닭이 낳은 것이니 먹어보라고. 농사지은 배추까지 몇 통. 그리고 머지않은 날, 몇이 모여 거실에 난롯불 피워놓고 한 번 놀잔다. 고구마 구워 먹으며. 아침에 서리도 볼 수 있어? 내 말에 영은 호탕하게 웃었다. 역시 생각하는 게 남다르다고. 철없다는 말을 하지 않는 게 고마웠다. 어릴 적 친구니까 다 이해해주는 것이리라.


셋이 늦은 점심을 먹고 헤어졌다. 설 지난 후 보름 명절에 놀자는 약속을 하고. 그날 나는 떡집에서 맛있는 팥 시루떡을 사가리라. 예전 보름에는 꼭 팥 시루떡을 집집마다 해서 먹은 생각이 나서다. 그리고 하룻밤 묵고 아침 일찍 일어나 온 누리에 내린 하얀 서리를 보리라. 그리운 날들을 소환하면서.


고향에서 보낸 하루는 즐거웠고, 스산함을 느꼈으며, 무엇보다 동심으로 돌아간 날이었다. ‘현’과 ‘영’이 함께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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