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오랜만에 버스를 탔다. 좌석버스다. 출근시간 대를 조금 비켜 있지만 처음 가는 곳이고, 일을 마친 후 일정이 어떻게 될지 몰라, 대중교통이 편할 것 같았다. 한 번 갈아 탄 좌석버스에는 나를 포함하여 세 명이 타고 있었다. 앞에서 두 번째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제 바깥 풍경을 보며 여유롭게 웹서핑이나 하면 되리라.
집을 나올 때부터 약간 설레면서 긴장되었다. 처음 가는 곳이고 처음 보는 사람들과 어떤 일에 대한 회의가 목적이다. 요즘엔 사람 만나는 일이 많아졌다. 바쁘긴 하지만 활기가 생기는 것도 사실이다. 정류장을 향해 가는데 바람은 아직 차가웠다. 그 안에 훈기를 머금고 있다는 게 겨울과 달랐다. 확실히 봄은 가까이 왔다. 퇴직 후, 내 인생의 이모작도 봄처럼 시작되는 것일까. 그래서 설레면서 긴장되는 게 아닐까 싶다.
버스 안은 조용했다. 자리를 잡고 앉아 휴대전화를 꺼냈다. 내가 찾아갈 곳을 미리 컴퓨터로 검색해 보고 왔지만 다시 확인했다. 환승은 정확하게 했다. 이제 어디서 내려야 하는지 꼼꼼하게 다시 살폈다. 또 도보로 얼마나 걷고 어떻게 찾아갈 것인지도. 도합 두 시간 가까이 걸리는 거리다. 40여 분 더 가야 한다. 멀다. 미리 나온 게 다행이다. 교통상황이 안 좋으면 지각할 테고, 모두 바쁜데 그건 실례다.
회의 장소를 머릿속에 입력하고 뉴스를 검색한다. 글 쓰는 플랫폼에 올라온 글을 읽는다. 차가 흔들려 댓글 쓰기 쉽지 않다. 눈으로만 읽는다. 혼자 앉아 있지만 글의 작가와 동행하는 느낌이 든다. 그만큼 몰입된다. 가끔 풍경을 본다. 한강이 오른쪽으로 보인다. 얼음 하나 없고 고요한 강물. 강물은 저렇게 고요해서 정이 간다. 마음을 평온하게 한다. 다시 글을 읽는다. 글 속으로 빠져든다. 차는 한강 다리 중의 하나를 건넌다.
갑자기 육두문자 섞인 거친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었다. 좌석버스 운전기사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다. 차 안을 둘러보니 나 외에 두 사람이 더 있다. 욕이 섞인 거친 소리는 계속된다. 나까지 욕을 먹고 있는 느낌이다. 불쾌하기 그지없다. 일단 참았다. 설마 승객들이 있는데, 그치겠지 싶었다. 아니었다. 승객을 아랑곳하지 않고 십여 분 이상 계속되었다. 기사는 무척 화가 나 있었다. 그렇다 해도 운행 중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더구나 승객들이 있는데.
입이 달싹거렸다. 십여 분 이상 참았으니 이제 좀 자제해 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거친 말이 아니면 참아줄 용의가 있다. 망설이는 사이 십오 분을 넘어섰다. 목소리는 더욱 커졌다. 시간만 재며 눈치를 보고 있다. 승객 중에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다. 나는 왜 이렇게 용기가 없는 걸까. 말할까 말까 망설이고 눈치만 보고 있으니. 자제해 달라고 말하는 건 승객의 권리다. 그런데도 쉽지 않다. 기사의 말이 너무 거칠어 위협적으로 들렸기 때문이다. 공연히 봉변을 당하고 말 것 같았다.
이 나이 돼서도 옳지 않은 일에 나서지 못하다니 나는 비겁하다. 공연히 자책감까지 들었다. 그래도 저렇게 거친 사람인데 내게 욕이라도 하면 어떡하나 싶어, 참고 참았다. 시비라도 붙는다면 기분만 더 나빠질 것 같았다. 내가 고민하는 중에도 거친 목소리는 계속 흘러나왔다.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아 말하려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참에, 기사의 목소리가 멈추었다. 전화를 끊은 모양이다. 안도하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지금 세상에 아직도 저런 기사가 있나 싶다. 뉴스에 나는 것은 대부분 승객이 기사에게 부당하게 대하는 것이었는데. 심지어 폭행하는 장면도 있지 않았던가. 기사가 운행 중에 누군가와 육두문자 쓰며 통화하는 것은, 승객에게 하는 간접 폭언 아닌가. 집을 나설 때 설레던 마음이 싹 사라지고 어서 목적지에 닿기만을 바랐다. 묵묵히 앉았던 남자 승객 두 사람도 나와 같은 기분이었을 것이다.
결국 아무 말도 못 하고 목적한 정류장에 와서 하차했다. 이제 회의 장소를 찾아가야 한다. 불쾌한 마음을 털고 내가 할 일을 해야 한다. 스스로 마음을 다스렸다. 걷는다. 두리번거리며 머릿속에 저장해 둔 경로를 찾아 발걸음을 옮긴다. 낯선 거리는 호기심을 자극하면서 약간 두려움을 주기도 한다. 훈기를 머금은 바람이 살살 나를 달래준다. 이제 털어야 한다. 자제해 달라고 말하지 못했던 비겁함도 잊어야 한다. 목적한 곳을 찾는 게 지금 할 일이라고 최면을 걸었다.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높은 건물들이 죽죽 늘어서 있다. 한 건물 앞에 두터운 코트를 입고 모자를 쓴 영국신사 차림의 남자가 대뜸 묻는다. 어딜 찾느냐고. 미소 띤 얼굴로 묻는 신사는 그 건물의 안내원 같았다. 친절했다. 긴장이 스르르 풀리며 따스함을 느꼈다. 어떻게 알았느냐며 목적한 곳을 말했다. 신사는 척 보면 안다며 자세히 알려주었다. 그로부터 세 번째 있는 건물이었다. 들어가는 입구까지 자세히 일러주었다. 멋지다. 지나는 사람의 애로를 살필 줄 아는 그 마음이.
버스에서 느꼈던 불쾌한 감정이 봄눈 녹듯 모두 사라졌다. 집에서 나섰을 때 그 기분, 설레면서 긴장되는 기분으로 금세 돌아갔다. 발걸음이 더욱 가벼워졌다. 찾아가는 장소 앞 매화나무가 꽃망울을 머금고 있었다. 길을 알려주던 친절한 신사의 미소를 닮았다. 두 남자로 인해 내 기분이 엎치락뒤치락한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