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삼일절을 맞이하며
삼월 하늘 가만히 우러러
삼일절이다. 나는 유관순 열사의 집 앞에서 삼일절 기념식을 한 적이 있다. 열사의 생가가 있는 지역 중학교에 다닐 때였다. 안마당이 넘겨다 보이는 바깥마당에서 우리 학교 학생들이 모여 기념식을 했다. 그 행사의 절차를 기억하지 못한다. 역사적 인물의 집 앞에서 행사를 한다는 것만이 신기했던 기억이 난다. 경건한 마음만은 가졌던 것 같다.
그즈음이었다. 집에 가기 위해 버스를 타고, 혼자 앉아 있는 할머니 옆에 앉았다. 할머니는 내게 말을 걸었다. 혹시 열사의 생가 마을을 아느냐고. 며칠 전에 삼일절 기념식을 거기서 한 적 있다고 했다. 할머니는 열사의 친구란다. 호기심이 들었다. 그럼 이화학당에 같이 다녔냐고 물었고, 열사가 어떤 사람이냐고 물었다. 그때 나는 내성적이어서 타인과 쉽게 말하지 않았는데, 그날은 달랐다.
열사의 친구는 열사와 함께 이화학당에 다녔다며 이야기를 이었다. 유관순 열사는 남자 성격으로 걸걸했고, 거침이 없었으며, 남의 아픔을 그냥 보아 넘기지 못하는 의로운 사람이었다고 했다. 푸른 하늘 가만히 우러러보며, 유관순 누나를 생각합니다, 로 시작되는 노래 가사 때문인지, 나는 열사에 대해 여성스러운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남자 성격이라는 부분이 납득되지 않아 자꾸 물었다. 정말이냐고. 열사의 친구는 고개를 깊이 끄덕였고, 눈물이 괴었다.
그 외에 공부 열심히 하라는 당부며, 그래서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격려까지 들었다. 그러면서 가방에서 과자를 하나 꺼내 주었다. 극구 거절하는 내 손에 쥐어준 그 과자는 만주였다. 그걸 손에 들고 먹지 못했다. 열사의 친구는 자꾸 먹으라고 했지만. 그대로 손에 들고 집 앞 시외버스 정류장에서 내렸다. 마을 입구로 들어오면서도 먹지 못했고, 막냇동생에게 주었다. 열사의 친구를 만났다는 것이 이상하게 가슴 뜨겁게 했다. 그때 나는 열다섯 살의 소녀였다.
그때 열사의 친구를 만난 게 사실이었을까 싶을 정도로 오래된 일이다. 그래도 친구인 열사를 자랑스러워하며 평소 모습을 전하던 모습은 선명하게 떠오른다. 눈에 괴었던 눈물도. 회상해 보니 그분도 결기가 있어 보였고, 보통 할머니로 보이지는 않았다. 이 이야기를 하자니, 내가 아주 나이 많이 든 사람으로 상상하는 이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대략 따져보니 그때 열사의 친구는 팔십 살이 가까운 나이로 추측된다.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른 후, 다시 열사의 생가와 기념관에 들른 적이 있다. 생가를 돌아보며 중학교 때 기념식 하던 장면을 떠올렸다. 기념관을 둘러보며 열사를 추모하기도 했다. 그때도 열사의 친구가 생각나 동행한 사람에게 만났던 이야기를 해주었다. 별로 감흥이 없는 듯했다. 직접 만난 것이 아니니, 열사의 친구 눈에 괴던 눈물을 언급해도 그냥 그랬느냐고 되받았다. 친구는 닮는다더니 그분도 결기가 있어 보였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열사의 친구를 만났을 때 내가 느꼈던 것이 있다. 우리에게는 역사적인 일이지만 그분에게는 여전히 현재처럼 생각되는 듯했다는 것이다. 역사적인 사건들 모든 게 이제 그저 과거로만 생각되는 게 보통이다. 당사자에게는 언제나 현재지만. 그날 여쭤보지 않았으나 분명히 열사의 친구도 삼일운동 때 무슨 역할을 했을 것 같다. 적어도 태극기 들고나가 대한독립만세를 외쳤을 것이다. 태극기를 만드는 일에 동참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그분에게는 언제나 현재일 것 같다.
며칠 전에 삼일절 행사에 참석해 달라는 초청장을 받았다. 늘 받았지만 참석하지 않을 때가 대부분이었다. 어제 주최 측에 가겠다고 전화했다. 우리의 독립이 자력에 의해 얻어진 것은 아닐지 몰라도, 나라를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는 당대 사람들의 마음이 모여 이루어진 결과라고 생각한다. 세상의 어떤 일도 그냥 이루어지는 것은 없으니까. 이번에는 독립만세를 외쳤던 그 순전한 정신을 기념해야겠다.
그렇게 마음먹어서 그럴까. 뜬금없이 50년 넘은 열사의 친구를 우연히 만났던 일이 떠올랐다. 그분도 이제는 하늘로 돌아갔으리라. 그곳에서 열사를 만나 못다 한 우정을 나누었으리라. 어떤 소녀를 만나 나누었던 이야기도 화제가 되었을까.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되는 순간들이 벌써 반세기를 넘어가고 있다는 게 놀랍다.
아침에 태극기를 달았다. 유관순 열사와 당대 사람들이 그렇게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던 태극기를. 마음이 경건해졌다. 이제 준비하고 기념식장으로 가야겠다. 나도 모르게 흐릿해진 삼일운동 정신을 마음 깊이 새기며. 현실의 삶이 고단해 정신없이 살다가도 한 번씩 걸음을 멈추고 우리의 역사를 돌아보는 시간도 필요할 것 같다. 과거가 있으므로 오늘이 있고 또 내일이 있는 것이니까.
오늘 나는 삼일절 기념식을 하러 간다. 아니, 그 시절의 뜨거운 가슴들을 만나러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