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중학교 때 친구를 만났다. 그가 살고 있는 동네를 지나며 내가 전화했다. 마침 점심시간이었다. 공휴일이어서 가족끼리 지내는데 방해가 되는 건 아닐까 우려했지만 지나는 길이므로. 점심 같이 할까. 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좋다고 말했다. 내가 잠시 기다렸고, 친구가 걸어서 나왔다. 만난 지 5년이 넘은 것 같았다.
지척에 살고 있지만 남자동창생이라 만나기 쉽지 않았다. 그래도 안부 전화를 하며 지내는 사이였고, 늘 조만간 얼굴 보자는 말로 전화를 끝내곤 했다. 말뿐인 영혼 없는 말 같아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 친구도, 나도, 아직은 사회활동을 하는지라 시간이 여의치 않았다. 또 이성친구인 우리 둘이 만난다는 것도 약간 부담스러웠다. 지난번에 안부 전화를 나누며 내가 밥 한 번 사겠노라 말했기 때문에 지나는 길에 물은 거였다.
말을 해놓고 이행하지 못하면 나는 그게 영 개운치 않다. 얼른 실천해야 마음이 편하다. 그래서 쉽게 말하지 않는 편이다. 친구가 흔쾌히 응하니 고마웠다. 차를 세우고 3분쯤 기다렸을까. 저만큼에서 친구가 나타났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별로 변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서로 똑같네, 변함없네, 반가워하며 악수를 나누었다.
사실 친구와 나는 남다른 인연이 있었다. 나의 먼 친척 언니 집에서 그 친구가 중학교 다닐 때 하숙을 했다. 그래서 언니네 집에 들르면 친구가 있곤 했다. 그래도 따로 말을 걸어본 적 없이 우리는 졸업했고, 성인이 되어 동창회 모임이 있을 때 만났다. 그때 언니 안부를 주고받으며 약간 가까워진 듯하다. 그 후에도 동창회 때마다 언니의 근황을 친구가 물었고, 나는 아는 것을 들려주곤 했다. 한 십오 년쯤 전에 함께 언니 집을 방문하자고 했지만 못했다. 그는 하숙집 아주머니인 언니에게 특별한 정이 있는 것 같았다. 그게 남다른 인연이라면 인연이다.
우리는 코다리찜을 먹기로 했다. 바로 근처에 자주 가는 식당이 있다기에 거기로 갔다. 시래기가 들어간 푸짐한 코다리찜이 나왔다. 맛있었다. 밥 한 그릇을 다 먹었는데도 코다리찜이 남았다. 밥 한 공기를 더 주문했다. 둘이 나누어 먹자고 했는데, 친구는 더 못 먹겠단다. 할 수 없이 내가 다 먹었다. 내가 밥 두 공기를 먹더란 이야기는 절대 하지 말라고 부탁했다. 친구가 유쾌하게 웃었다.
내가 음식 값을 내기로 했는데, 친구는 자기 동네라서 절대 안 된다고 우겼다. 어찌나 완강한지. 불러낸 사람이 밥값을 내야지 그런 법이 없다며 나 또한 물러서지 않았지만 식당 주인이 친구의 카드를 받고 얼른 계산을 마치는 바람에 실패하고 말았다. 민망하기 그지없었다. 내가 살 생각으로 부른 것인데, 그런 상황이 되고 말았으니. 어쩔 수 없었다. 내가 커피를 사겠다고 하자 좋다며 카페로 향했다.
커피를 놓고 마주 앉아 보니 의외로 참 편한 사람이었다. 그 친구도 그렇게 느꼈나 보다. 이렇게 편하고 좋은 친구인데, 예전엔 몰랐다고 한다. 학창 시절에 말 한마디 안 했던 것을 떠올린 듯했다. 시골의 우리 학교는 한 학년이 두 개 반씩, 전교생이 여섯 개 반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니 선후배들도 모두 다 잘 알았다. 남녀공학이었고 한 반에 남녀학생이 섞여 있었다. 남학생이 삼분의 이, 여학생이 삼분의 일 정도로.
친구가 예전의 일을 하나 꺼냈다. 언니 집에서 하숙할 때 내가 왔더란다. 그래서 말을 붙였는데, 새침데기처럼 들은 척 안 해서 무참했단다. 그 후로 나에게 말을 건 적이 없었다고. 사실은 친하게 지내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데도. 그때 나는 누구에게나 그랬다. 갑작스러운 삼촌의 부재로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던 때였으니까. 내 설명을 들은 친구는 이해한다고 말했다. 그 의문이 오십 년 지나서 풀렸다며 웃었다.
친구는 작년 말로 직장에서 퇴직했단다. 두 달 놀아보니 아주 좋다고 한다. 요즘엔 산에나 다니며 손자 가끔 봐주는데, 손자가 그렇게 예쁠 수 없단다. 예전에 자식 키울 때 전혀 느껴보지 못한 것을 이제야 느낀다며, 자식 키우는 재미가 이렇게 좋은 줄 몰랐다고 한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여서 둘이 공감하며 웃었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이성친구고 동성친구고 이제 아무런 경계가 없어진 것을 발견했다. 그도 그런 듯했다.
근처 사는 다른 친구들과 함께 자주 만나자고 했다. 나도 찬성이다. 지금의 모습을 편견 없이 봐줄 수 있는 친구, 밥 두 공기 먹은 것도 전혀 민망하지 않은, 솔직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친구, 어릴 적 친구가 갖고 있는 장점이다. 헤어질 때 다시 한번 말했다. 내가 밥 두 공기 먹은 거 비밀이라고. 큰 소리로 웃으며 걱정하지 말란다. 실은 두 공기 먹거나 한 공기 먹거나 무슨 상관인가. 나도 그저 웃자고 하는 말이었다. 이래서 친구는 오랠수록 좋다는 것인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