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그녀는 끊임없이 이야기했다. 뒷산 산책로에서였다. 조붓한 길, 작년에 떨어져 마른 가랑잎이 바스락거리는 길. 새싹 틔울 준비한 나뭇가지는 볼록볼록 부풀어 올랐다. 동고비가 포르릉 포르릉 날아다니고 종달새 노랫소리는 하늘 높이 울려 퍼졌다. 하늘은 맑디맑았다. 낙원이 있다면 이런 곳일까. 그녀의 이야기는 한갓되이 들렸다. 누가 많이 가졌고 어떻게 호화롭게 사는지 하는 것은, 솔직히 내 관심 밖이다. 더구나 전혀 나와 무관한 불특정한 사람 이야기는.
건성으로 대답하는 것을 그녀가 눈치챘다. 안 듣는 거냐고 다그쳤다. 아니라고, 봄을 느끼느라 집중하지 못할 뿐이라고 변명했다. 그녀는 화가 난 듯했다. 왜 집중하지 않느냐며 그만 말하겠다고 했다. 좋은 생각이라고, 내가 알지도 못하는 남의 이야기 썩 유쾌하지 않다고, 우리 이야기하자고. 속내를 드러내고 말았다. 그녀는 말이 없더니, 산책로 의자에 털썩 앉았다. 뚱한 표정이었다.
피로감을 느꼈다. 그녀는 가끔 같이 산책하는 이웃이다. 그동안 내 감정과 상관없이 그녀 편에서 이야기하고 받아주었는데, 그날은 자연 속에서도 세속의 이야기를 끊임없이 들어야 하는 게 힘들었다. 그녀 자신의 삶도 아니고, 몇 다리 건너 나와 무관한 사람의 이야기는 더욱더. 자주 있는 일이었다. 그래도 잘 들어주었는데, 그날은 드디어 피로감이 극에 달한 모양이었다.
의자에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앉아 있는 그녀에게 이유를 설명했다. 자연이 아름답지 않으냐, 자연 속에서 세속의 이야기를 하는 것보다 자연을 느끼는 데 집중하느라 그랬다. 그리고 초호화판으로 쓰고 사는 사람들 이야기 솔직히 관심 없다. 거기에 삶의 진정성이 담긴 것은 아니지 않으냐. 그래서 피곤했다. 나는 저 새소리가 더 듣기 좋고, 조붓한 산책로에 떨어진 낙엽 밟는 소리가 더 소중하다. 이제 좋은 이야기 하자. 힘들게 살면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사람들, 꿈을 향해 부단히 노력한 사례들, 앞으로 삶을 어떤 자세로 살 것인가 하는 그런 것들에 대해. 솔직히, 지금 한 이야기는 들어도 아무런 감동이 없다 등등.
나도 불편했다. 강의 시간도 아닌데, 내가 왜 강의처럼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 내가 모르는 대상이라 해도 본인과 직접 관련이 있는 이야기라면 상관없다. 아니, 관련이 없어도 좋다. 심지어 누가 트롯을 잘 부르더라, 이번에 누가 일등 할 것 같다, 당대표가 누가 될까, 코스피 지수는 어떻게 변동될까 등의 이야기라면 얼마든지 나눌 수 있다. 보편적 관심사고 세상 사는 이야기니까. 그런데 전혀 알지도 못하는 어떤 사람이, 어떻게 호화롭게 살고, 얼마나 가졌는지, 전혀 관심 없다. 그런 이야기를 끊임없이 들어야 하는 건 피곤했고, 내가 왜 그런 이야기에 관심이 없는지 설명하는 것은 불편했다.
본질적으로 나는 남의 말하는 게 싫다. 남의 말은 들어도 잊는다. 마음에 두지 않는다. 그래서 누구에게 전하지도 못한다. 대신 나와 관련 있는 것은 아주 어렸을 때 일이라도 상세하게 기억하는 편이다. 남의 말하는 게 싫은 것은, 그것이 사실이 아닐 수 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본질을 흐리게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당사자는 얼마나 억울한 일이겠는가. 아니면 말고 식의 무책임한 태도,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인격을 가진 인간으로선.
글 쓰는 사람으로서 물론 사람과 사람의 삶에 관심이 많다. 문학은 삶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소재로 삼고 사람을 탐구해야 하는 일이므로. 지극히 개인의 경험이라 해도 보편적 정서로 확장될 수 있는 것이라면 얼마든지 이야기할 수 있고, 작품의 소재로 삼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녀가 하는 이야기는 한두 번 들었으면 된다. 계속해서 듣는 건 피로하다. 피로감을 느껴도 계속 호응하며 들어야 한다는 건 힘든 일이다.
하지만 그녀에게 내가 상처를 주는 것도 불편한 일이다. 설명을 다한 후, 그녀를 안아주었다. 당신의 삶은 이대로 아주 멋지고 좋아 보인다면서. 그녀가 이야기하는 대상을 한없이 부러워하며 자기의 삶을 부정하고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녀의 눈에 물기가 돌았다. 내가 더 꼬옥 안아주었다. 등을 다독이며. 누군가는 이 모습 이대로의 당신을 멋지게 생각할 것이고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남과 비교하지 말라고, 비교하는 순간 비루해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고.
목적했던 곳까지 가지 못했다. 의자에 앉아 이야기를 하느라 시간이 흘렀기 때문이다. 누군가와 함께 하는 산책이 때로는 힘들다. 함께 간 사람을 배려해야 하므로 오롯이 내 마음에 집중할 수 없다. 그래서 마음속에 있는 이런저런 감정의 부산물들을 버리지 못하고, 더 복잡해지기도 한다. 마음을 맑히고 몸을 가볍게 하는 게 산책인데, 돌아와서도 마음이 복잡하고 몸이 무겁다면 시간만 버린 셈이다.
그날의 산책이 그랬다. 그녀를 안아주고 섭섭한 마음을 풀어주려 애쓴 시간이 유쾌하지 않았다. 피곤했다. 좋은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 불편한 이야기를 계속 들어줘야 했을까. 포화상태가 된 그 피로감을 표현한 것이 지나쳤을까. 힘들었다. 사람의 관계처럼 힘든 게 없다. 그걸 새삼 느꼈던 날이다. 그런 가운데도 볼록 솟아오른 진달래 꽃망울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말끔하지 않은 내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