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 별일 없이 사는 것

일상

by 최명숙


떠올리고 싶지 않다. 그래도 가끔 불쑥 떠오른다. 나와 전혀 무관한 일이고 내가 목격한 것도 전혀 없는 사건이었다. 그 자리를 피했다는 게 기적에 가깝다. 내 의도는 아니었다. 단지 운명적으로 그리 되었을 뿐이다. 누가 그랬다. 이 복잡하고 위험한 세상에서 매일 별일 없이 살 수 있다는 게 기적이라고. 맞는 말이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생길지 불안하고 불확정적인 일로 긴장한다. 현대인 대부분의 가슴에는 그런 불안감이 도사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주 오래전 일이다. 끔찍한 사건 현장을 지나게 되었다. 우연이었고 난 알지 못했다. 친구를 만나기 위해 그곳을 지났을 뿐이다. 자가용이 없던 때였다. 이른 봄이었고 달이 밝았으며, 나는 친구네 마을로 들어가는 막차를 놓쳤다. 기왕 나선 걸음이었고 서울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늦게 나선 것이 문제였다. 꼭 와달라는 친구의 전화를 받고도 바로 나설 형편이 되지 못했다. 일을 마치고 떠났을 땐 이미 저녁나절이었다. 그래도 가야 했다. 딱한 형편에 놓인 친구를 외면할 수 없었다.


읍에 있는 버스정류장에서 3km쯤 걸어야 했다. 두 번 가본 적 있고 달이 밝았다. 택시가 없어 걷기로 했다. 시골길은 한적했다. 약간 무섬증이 일었지만 3km쯤이야 걸어갈 자신이 있었다. 이른 봄의 밤바람은 차가웠다. 멋을 부린 것은 아니었으나 스커트에 재킷차림의 옷은 얇았다. 낮에는 적당했는데. 포장되지 않은 울퉁불퉁한 도로. 굽 높은 구두를 신고 걷긴 쉽지 않았다. 달이 밝아도 밤이었으니.


드문드문 보이는 집에서 따뜻한 불빛이 흘러나왔다. 무서운 생각이 들면 노래를 불렀다. 가느다란 목소리로. 가곡, 가요, 찬송가까지 두루 섭렵해서. 가끔 달이 구름 속으로 숨으면 어두워서 발을 헛디디기도 했다. 친구에게 마중 나오라고 하지 못했다. 형편이 여의치 않았기 때문이다. 손에 든 주스상자는 생각보다 무거웠다. 어깨에 걸친 가방은 자꾸 흘러내렸고. 후회스럽기도 했다. 어떻게든 택시를 탔어야 했는데 하는.


저쪽에서 시커먼 물체가 보였다. 둘이다. 가슴이 콩닥거렸다. 대범한 척 무심한 척 걸었다. 달이 구름 속에서 나와 다시 환한 빛을 뿌렸다. 두 사람이다. 남자들. 한 사람은 젊은이였고 한 사람은 늙수그레했다. 부자 사이 같았다. 어서 친구네 집에 닿아야 한다는 생각이 커졌다. 늙수그레한 남자가 말을 붙였다. 어디 가슈. 가슴이 쫄밋거렸다. 네, 저기 ㅇㅇ네 집에 가요. 제 친구거든요. 혹시 그 동네 사세요? 쓸데없는 말을 건넸다. 남자는 그 동네 사람은 아닌데, 친구를 잘 안다며 조심해서 가라고 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 또 노래를 웅얼대며 걸었다. 느낌이 이상하게 섬뜩해졌다. 그럴 일이 없는데 알 수 없는 일이다. 사람도 차도 지나가지 않는 길, 고요만이 깔린 길이다. 지나치는 어느 집의 반짝이는 불빛만 가끔 빛날 뿐. 그 불빛이 조금 전과 달리 차갑게 다가왔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섬뜩한 느낌은 휙 휙 가슴에 엄습해 왔다. 찬송가를 부르며 걸었다. 그래도 불안했다. 묘한 느낌이었다.


걷고 있는 길 건너, 산 아래쪽에서 무슨 소리가 난 것 같았다. 무섬증이 극에 달했다. 저절로 촉수가 그쪽을 향했다. 달빛 아래 고요만이 감돌았다. 마음은 더 불안하고 무서웠다. 이유도 없이 이상했다. 노래를 멈추고 뛰었다. 들고 있는 주스상자를 내려놓고 싶을 정도였다. 잘 뛰어지지 않았다. 꿈속에서 누군가에게 쫓길 때처럼 아무리 뛰어도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듯했다. 저만큼 친구네 집 불빛이 보였다.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친구네 집에 도착했을 때 윗옷에서 선득선득한 느낌을 받았다. 블라우스가 젖었다는 걸 알았다. 갑자기 닥친 어떤 일로 친구는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그녀를 위로하고 해법을 찾느라 머리를 맞댔다. 그런 중에도 섬뜩했던 느낌이 거머리처럼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그것의 정체가 도대체 뭘까. 자리에 누워도 잠이 쉬 오지 않아 뒤척대다 간신히 잠이 들었고,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오후 수업을 위해 그곳을 떠났다.


그 알 수 없는 섬뜩함의 정체를 안 것은 그로부터 3일 후였다. 친구가 집으로 전화를 했다. 그날 밤에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다는. 그것도 내가 지나온 그곳 인근에서. 사건 발생 시각도 내가 그곳을 통과할 즈음이었다. 무서웠다. 간발의 차로 피했던 거다. 그날 내가 만났던 두 남자, 부자 사이로 보이던 그들도 조사를 받았다고 했다. 다행히 그들이 나를 만났다는 말을 하지 않아, 불러 조사하지 않았다. 나를 불렀대도 내가 본 것은 없었으니까. 이상하게 이유 없이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는 것이 무슨 도움이 되었으랴. 알고 보니 그들은 친구의 먼 집안사람이었다.


알 수 없는 그 섬뜩함의 정체가 끔찍한 그 사건 때문이었던 걸까. 친구에게 그 이야기를 했다. 그래서 사실은 많이 무서웠다고. 식은땀이 흘러 블라우스를 적셨다고. 그녀는 네가 믿는 신이 지켜주신 것 같다며 놀라워했다. 마을 인근에서 일어났던 그 사건을 계기로 친구는 삶의 태도가 바뀌었단다. 현재 겪고 있는 일은 큰 그림으로 볼 때 사소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 시각에 그녀도 나를 마중하러 나오려고 일어서는데, 자고 있던 아이가 울어 다시 재우다 보니, 내가 도착했다는 것이다.


범인은 아직도 잡히지 않았다. 40년이 흘렀는데도. 피해자는 친구가 아는 두 명의 여성이었다. 지금도 가끔 그날의 그 느낌이 불쑥 나를 에워쌀 때 있다. 끔찍한 사건과 부딪쳤을 뻔했다는 생각에 이르면, 온몸에 소름이 돋으며 진저리가 쳐진다. 생각하면 우리가 이렇게 별일 없이 사는 게 기적이라면 기적이다. 평범한 일상이 주는 나른함도 그 일을 생각하면 감사할 따름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꽃망울이 내 마음을 어루만져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