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머리를 스스로 자를 때가 있다. 미용실에 미처 못 갔을 때다. 뒷머리는 못 자르고 앞머리와 옆머리를 자른다. 물론 미용을 배운 적은 없다. 미용가위도 없다. 머리카락을 조금씩 쥐고 눈썹 정리하는 작은 칼로 샥 샥 자른다. 아직 이상해 보인다는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런 걸 보면 봐줄 만한가 보다.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는데 나를 보면 그건 아닌 듯하다. 머리카락을 스스로 자른다는 사람이 흔하다.
내가 어릴 적만 해도 아이들 이발을 집에서 하는 게 보통이었다. 남자아이는 기계로 박박 밀었고, 여자아이는 단발로. 그러니 별로 어려울 일도 없었다. 어쩌다 이발소에서 머리를 자를 때도 있었다. 그때는 의자에 올려놓은 빨래판에 앉아, 싹둑싹둑 잘려나가는 머리카락을 보곤 했다. 이발소 벽에 걸린 액자의 그림은 물레방아가 그려진 농촌 풍경이었다. 거기에 시가 쓰여 있었다. 정지용의 ‘호수’였다. 내가 기억하는 우리 동네 이발소 풍경이다. 이발소에 가면 나는 상고머리를 했는데, 명절 즈음에 한두 번 가는 게 다였고, 보통 집에서 단발머리로 잘랐다.
우리 옆집에는 아들 하나에 딸이 다섯이었다. 아주머니는 농사일과 집안일로 항상 바빴다. 아이들 머리 깎아주는 일도 수월하지 않을 정도로. 그래서 우리 어머니가 그 아이들 머리를 자주 잘라주었다. 그러다 어머니까지 바쁘면 나에게 부탁하기도 했다. 무슨 배짱이었을까. 경험이 전혀 없는 나였는데, 선뜻 그 아이들 머리를 잘라주었다. 한 번 그러고 나자 아주머니는 으레 나에게 맡기곤 했다. 중학교 다닐 때쯤이었다. 하긴 학교에서 친구들끼리 서로 머리를 잘라주기도 했으니까. 단발머리여서 어려울 것도 없었다. 똑바로 자르기만 하면 되었으니.
나는 미용에 소질이 있는 줄 알았다. 내가 옆집 동생들 머리를 깎아주면 아주머니가 잘했다고 칭찬해 주셨기 때문이다. 결혼 후 미용기술을 배우려고 했던 것도 그래서다. 하지만 미용을 배우면 평생 벌어먹고 살아야 한다며 시어머님께서 만류하시는 바람에 못 배우고 말았지만. 아마도 배웠다면 금세 그쪽에서 이름을 날리는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아, 그러면 작가는 되지 못했을 것 같으니 아쉬워하지 말자. 아무튼 나는 옆집 동생들 머리를 자주 잘라주었다.
89세 연로한 친정어머니를 생각하면 마음이 복잡하다. 고향집에 홀로 사시기 때문이다. 다행히 고향 마을에 친구들도 계시고, 복지관에 다니셔서 심심치 않다고 하지만 꼭 죄지은 사람 같은 생각이 든다. 몇 해 전부터 어머니의 친구인 옆집 아주머니가 아들네로 가시는 바람에, 비어 있던 집에 딸이 와서 산다. 참으로 다행이다. 그 옆집 동생은 어머니를 곰살궂게 잘 살펴드리기도 한다.
눈이 오면 어머니가 일어나기 전에, 옆집 동생 내외가 친정집 마당까지 깨끗이 쓸어놓는단다. 색다른 음식을 해도 부르거나 갖다 드리고. 그뿐 아니라 가족끼리 외식하러 갈 때 같이 가자고도 한단다. 어머니는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동참하지 않지만. 어쨌든 멀리 있는 딸들보다 옆집 딸이 낫지 않은가. 어머니가 보이지 않으면 부르거나 찾아본다니, 보통 살가운 게 아니다.
친정에서 그 동생을 처음 봤을 때 놀랐다. 거의 40년 만이었다. 어린애였던 모습만 생각나는데, 오십 살이 넘었다니 말이다. 어머니 보살펴 줘서 고맙고 든든하다 했더니 동생은 손사래를 쳤다. “언니도 참 별소릴 다하세요. 옛날에 언니가 제 머리 깎아주고 숙제 봐주고 그러셨잖아요.” 하며. 옛날 생각이 나느냐니까, 당연하다며 그때 생각하면 아주머니께 더 잘해드려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 미안하단다. 내가 뭘 그리 한 게 있다고 그럴까 싶어, 동생의 손을 잡고 재차 고맙다고 말했다.
바쁜 아주머니를 대신해 머리를 잘라주긴 했다. 나 역시 그때는 어렸고 미용을 배우지 않은 솜씨니 제대로 했겠는가. 그래도 동생이 잊지 않은 게 신기하다. 어려서 다 잊었을 법 한데. 그 어린애가 언제 이렇게 커서 나와 비슷하게 늙어가고 있을까 싶기도 했다. 자랄 때는 차이가 많이 났던 것 같건만, 나이 드니 열 살 넘는 나이 차이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동생은 옆에 아주머니가 계셔서 엄마 같고 좋단다. 그것도 고마운 일이다.
어머니에게 오는 우편물들 중에 이해 잘 안 되는 것은 옆집 동생에게 물으신단다. 그러면 잘 설명해 주고 신청해야 하는 것은 대신해주기도 한다니, 고마움을 더 말해 무엇하랴. 고향에 갈 때 가끔 과일이나 음료수를 들고 가, 고마운 마음을 전하는 게 다다. 너무 알량해서 민망한데, 그것도 동생은 극구 마다해 간신히 놓고 오는 실정이다. 더하면 부담 느낄까 봐 아주 가끔.
내 휴대전화에도 옆집 동생의 전화가 저장돼 있다. 거는 일은 없지만 든든하다. 어머니께 무슨 일이 생기면 전화가 올 테고, 나도 어머니가 전화를 안 받으실 때 무슨 일이 있는지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코흘리개 꼬맹이, 내가 숙제 봐주고 씻겨주기도 했던 그 아이가 지금은 내 어머니를 보살펴 드리고 있다는 사실이, 묘하다는 생각이 든다. 인생이 그런 걸까. 그 동생은 받았던 것을 이렇게 갚고, 나는 어머니를 통해 받고 있는 걸까. 돌고 도는 게 인생이라더니. 엄정한 진리인 것 같은 그 사실에 앞서, 새삼 깊은 이웃의 정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