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임진각, 이십 년 전에 가보긴 했는데 가물가물했다. 친구 딸의 결혼식이 끝난 후, 참석한 친구들에게 바람을 넣었다. 모처럼 만났는데 이렇게 헤어지는 건 아쉽지 않으냐고. 문산까지 왔는데 ‘임진각’에라도 가보자고. 시간이 되는 친구들 몇이 의기투합. 각자 타고 온 차를 예식장 주차장에 두고, 한 대의 차에 올랐다. 8km만 가면 되었다. 오전에 내리던 비는 멈추었고 햇살이 온 누리에 내렸다.
우리는 중학교 동창생들이다. 차에 오른 넷은 금세 열대여섯 살 중학생이 되었다. 그것 참 이상한 일이다. 그때의 친구들을 만나면 꼭 그 시절로 돌아가니 말이다. 타임머신이 따로 없다. 친구들이 타임머신이다. 조잘조잘, 재깔재깔, 하하 깔깔. 작은 차 안이 왁자지껄했다. 아무것도 아닌 말에 웃음이 터졌고, 서로 이름 부르며 반말을 했다. 이런 게 동창생의 특성이긴 하다. 그래서 거슬리지 않는다.
임진각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바람이 세차게 불었고 약간 추웠는데 찾아온 사람들은 많았다. 임진강 건너 멀리 보이는 저곳이 북한 땅이란다. ‘망배단’에서 실향민들이 명절이면 차례 올리던 모습이 떠올랐다. 고향을 지척에 두고 가지 못하는 사람들의 안타까운 심정이 체감되었다. 임진각에서 내려올 때 망배단을 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 가슴이 아팠기 때문이다.
“우리 살아있을 때 통일이 될까?” 뜬금없는 내 말에, 한 친구가 말했다. 어느 날 갑자기 될 수도 있다고. 그런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날까 싶었다. 또 한 친구는 통일되는 게 나쁘지 않으나 이대로 살며 교류만 하는 게 나을 것 같단다. 한숨만 푹 내쉬는 친구도 있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동요를 부르며 자란 우리들이다. 그런데도 통일에 대한 견해가 서로 달랐다. 모두 설득력 있었다. 무조건 통일이 돼야 한다는 순진한 생각을 갖고 있는 나인데도.
나의 그 생각은 녹슨 기찻길과 서 있는 기차를 보니 더 깊어졌다. 임진각에서 개성까지 22km라고 쓰여 있었다. 개성 사람들은 얼마나 더 기가 막힐까. 그 정도 거리라면 다섯 시간만 걸어도 갈 수 있는 거리 아닌가. 트래킹 하다 보면 그 정도 거리를 걷기도 하는데. “통일은 무조건 돼야 해. 실향민들이 모두 돌아가시기 전에 말이야.” 외치듯 하는 내 말에, 친구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바람 때문은 아닐 터다. 눈물이 자꾸 나와서 스카프로 닦았다.
넓게 펼쳐진 ‘평화누리 공원’을 걷고 사진을 찍었다. 공원에는 바람개비들이 힘차게 돌아갔다. 기도하는 모습으로 보이던 조형물은 가까이 보니 철사와 대나무로 만든 것이었다. 넓은 공원의 산책로, 조형물, 색색의 바람개비. 이름 그대로 평화로운 세상으로 보였다. 그런 세상을 꿈꾸며 저 공원을 조성했을 것 같다. 우리 모두의 바람이 그런 세상을 꿈꾸는 것은 틀림없으리라. 남북으로 대치하고 있는 우리의 상황이 비극적으로 다가왔다. 그러면서도 평화로운 세상을 꿈꾸는 것은, 우리가 한 나라였고 같은 동포이기 때문이리라. 분단현실이 안타깝기만 했다.
임진각을 떠나며 우리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모두 같은 마음일 것이다. 우리는 문산 시장 어느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커피를 마시러 갔다. 카페에 들어갔을 때 가라앉았던 마음이 생기를 되찾아 밝아졌다. 우리는 담소하며 차를 마셨다. 나는 잠깐씩 임진각에서 느꼈던 감정이 되살아났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찻집 주인이나 드나드는 사람들에게서 우수 비슷한 느낌이 배어 있다고 느낀 것은 비약일까. 어쨌든 나는 그랬다.
우리는 차를 마신 후 예식장 주차장으로 와서 헤어졌다. 헤어지면서, 한 친구가 바람 넣기를 잘했다고 했다. “그래, 난 바람잡이야.” 내 말에 친구들 모두 한바탕 웃었다. 이제 자주 보자고 했지만 언제 또 볼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그날도 5년 만에 만난 친구가 있었으니까. 쉽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인사를 그렇게 나누었다. 쉽게 만날 수 있는 것처럼.
이십 년 전에 가봤던 임진각과 달랐다. 그때는 신기하기만 했다. 저쪽이 북한이라니 하면서 망원경으로 보았는데. 이번에는 망원경으로 보고 싶지도 않았다. 임진강을 보는 순간 마음이 아파왔기 때문이다. 나는 실향민이 아니다. 우리 일가친척 중에도 실향민은 없다. 그런데도 감정이입이 되는 것은 왜일까. 나이가 들어서일까. ‘실향’에 내포된 보편적 정서 때문일까. 고향을 잃어버렸다는 게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가 말이다.
갑자기 고향이 건재하고 있다는 게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왔다. 가고 싶을 때 언제나 갈 수 있고, 선조들의 산소가 있으며, 어머니가 계신 곳. 어릴 적 친구들 몇이 가기만 하면 반겨주는 곳 고향. 통일이 되면 얼른 고향에 가고 싶어 휴전선 인근에 모여 살았다는 실향민들의 그 마음을 이제 좀 알 것 같았다. 실향민이나 그의 후손들을 생각하면 무조건 통일이 되어야 하는데, 현실은 많은 문제들을 안고 있으니 안타깝다.
문산을 떠나 서울로 들어설 때까지, 임진각의 망배단, 녹슨 기찻길과 기차, 임진강, 평화누리 공원이 머릿속에서 필름처럼 돌아갔다. 하지만 넘실대는 한강과 빌딩 숲 속으로 들어오며 다시 일상을 회복하고 있었다. 그렇게 또 잊히고 마는 것인가, 임진각과 녹슨 기찻길에서 느낀 통일에 대한 염원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