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사나이
그 남자를 만난 것은 산 정상에서였다. 가끔 궁금했다. 산 정상이 이리도 깨끗한 이유가. 아무리 산바람이 낙엽과 먼지를 쓸어낸다고 해도, 사람 손이 가지 않고 이럴 수 있을까 싶었다. 산에 오르는 사람들 가운데 나처럼 생각하는 이가 있었다. 어떤 남자가 청소를 하더라는 말을 바람결에 들었으니까. 나뭇잎과 나뭇가지가 널브러져 있는 곳이 산이지 않은가. 설마 그 산을 누가 쓸랴 하면서도, 이상하긴 했다. 계단이며 의자가 항상 깨끗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드디어 그 남자를 만난 것이다.
봄비가 내린 오후였다. 비 그치고 난 산에는 빗물이 다 스며들어 땅이 보송보송했다. 이런 날 산에 가면 풀냄새 흙냄새가 어우러져 참 좋았다. 물을 한 통 담고, 오이를 하나 씻어 배낭에 넣었다. 다른 간식은 필요 없다. 빗물에 깨끗이 씻긴 연두색 나뭇잎은 야들한 얼굴을 내놓고 햇볕을 받고 있었다. 등산로 입구에는 이제 피기 시작한 조팝꽃 아래 자주괴불주머니와 긴병꽃풀이 보랏빛 꽃망울을 터뜨렸다. 향긋하면서 풋풋한 나무와 풀냄새에 코가 절로 벌름거려졌다.
비가 막 그쳐서 그럴까. 산은 고요했다. 주택가 근처 산이라 늘 사람이 많았는데. 등산로는 빗물이 빠져 미끄럽지 않았고 먼지가 일지 않았다. 시야가 맑아 청계산이 바로 앞에 와 있는 듯 보였다. 자연에 취해 걷다보니 어느새 산 정상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애기나리꽃 군락지를 지나 조금만 더 오르면 정상이다. 가까이에서 들리는 맑은 꾀꼬리 노랫소리에 정신을 빼앗겨, 지고 있는 생강나무에 앉아 남은 꽃을 따먹는 새를 놓칠 뻔 했다. 아기직박구리였다. 얼른 사진을 찍었다.
쓰윽 쓰윽 싹, 비질하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어떤 남자가 정상에 오르는 계단을 쓸고 있었다. 한 계단 한 계단 정성스럽게. 비질하는 모습이 마치 수행하는 사람처럼 경건해보였다. 맑은 얼굴에 약간 불그레한 빛을 띤 것은 비질을 하느라 열이 올라서 그러리라. 남자는 어쩌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피해가며 쓸고 있었다. 성글게 맨 싸리비를 약간 기울여 계단과 그 아래까지. 비 온 뒤 산 정상에서부터 아래까지 청소하는 이가 있다는 말을 들었는지라, 무슨 말이라도 건네고 싶었다.
“좋은 일 하시네요. 고맙습니다.”
이 말 외에 더 할 말이 없는 듯했다. 내 말에 남자는 빙긋 미소를 띠기만 하고 말을 하지 않았다. 그걸로 충분했다. 때로 입에서 나온 말이 생각을 제한시켜 버리기도 하니까. 맑게 갠 하늘만큼이나 마음이 맑은 사람 같았다. 다람쥐 한 마리가 굴참나무 옆에서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이 산의 다람쥐는 사람들을 봐도 피하지 않는다.
깨끗한 계단을 오르며 나를 돌아보았다. 누군가에게 호의나 선의를 베풀었다가, 끊임없이 당연한 듯 요구하는 경우를 여러 번 겪으면서, 슬그머니 마음을 접어버린 나였다. 애초에 대가를 생각하지 않았는데도, 처음 먹었던 마음이 그대로 유지되지 않았다. 사람이 덜 돼서 그렇겠지만. 그러니 나는 하기 힘든 일이다. 어쨌든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남을 위해 하는 모든 일은 아름답다. 쉽지 않은 일이기에 더욱 그렇다.
정상에 오르니 땅에 그대로 누워도 좋을 만큼 깨끗했다. 옛날 우리 집 안마당처럼. 이렇듯 깨끗한 안마당을 보고 마을 사람들은 그랬었다.
“밥알이 떨어져도 주워 먹게 생겼네. 흙고물 하나 안 묻을 겨.”
할머니도 아침마다 싸리비로 정성스럽게 마당을 쓸었다. 싸르락 싸르락 비질 소리에 잠을 깨곤 했으니까. 우리는 저렇듯 깨끗한 마당에서 사방치기와 자치기를 하며 놀았고, 멍석을 펴고 저녁을 먹었으며, 농사지은 갖은 곡식을 널어 말렸다. 그뿐인가. 매캐하고 향긋한 모깃불 연기 속에서 눈이 빨개지도록 밤하늘의 별을 헤었고, 밤새 내리는 함박눈과 은은한 달빛을 보며 문학적 감성을 키웠다. 어린 내 몸과 마음이 성숙해가던 장소는, 저렇듯 깨끗한 산 정상처럼 말갛게 쓸어놓은 우리 집 안마당이었다.
빗물이 걷힌 나무의자에 앉아 물을 마셨다. 봄바람이 가만가만 불어왔다. 비둘기 두 마리가 날아와 아장아장 걸었다. 일어나 스트레칭하며 멀리 북쪽을 보니 인수봉이 가깝게 보였다. 환경이 깨끗하니까 멀리 있는 곳이 보이는 것처럼, 마음이 깨끗해지면 세상과 사람을 보는 혜안이 생길까. 욕심에 가려 못 보는 게 얼마나 많을까. 한동안 하늘을 바라보았다. 맑은 공기를 들이마시며 저 맑은 햇살을 내 마음 속에 들여놓으리라 생각했다.
산에서 내려오는 발걸음이 더욱 가벼웠다. 가슴이 부풀며 마음이 부유해진 것 같기도 했다. 산새들의 노랫소리가 더 다양하게 들리고, 풀 섶의 들꽃들도 많이 보였다. 다시 비질하는 소리가 들렸다. 곁길로 난 산 아래 계단을 그가 쓸고 있었다.
청아한 꾀꼬리 노랫소리가 봄 산에 울려 퍼졌다. 새소리에 봄꽃들이 화르르 피어날 것만 같았다. 등산객들이 하나 둘 올라오고 있었다. 저들도 깨끗한 산 정상과 계단을 보면 나와 같은 생각을 했을까. 세상에는 좋은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많고, 좋은 사람들에 의해 조금씩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 말이다.
앗! 무엇이 눈에 띈다. 여성용 등산모자다. 올라올 때 못 보았는데 땅에 떨어져 있다. 누가 놓치고 모른 채 가버렸나 보다. 등산로 옆 팥배나무 가지에 모자를 눈에 잘 띄게 걸어두었다. 주인이 찾아 가기를 바라면서. 모자를 발견한 주인의 기뻐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미소가 살며시 비어져 나온다.
비 갠 오후, 봄 산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싱그럽다. 그리고 깨끗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