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이언니를 만났다, 44년 만에. 솔직히 얼굴도 생각나지 않았다. 막연히 옥이언니를 닮았으리라 생각했다. 옥이언니의 언니니까. 오래전부터 옥이언니를 만나고 싶었다. 막연히. 그래, 막연했다. 소식이 끊어진 지 헤아릴 수 없이 세월이 흘렀으니까.
내 나이 열다섯 소녀 적이었다. 옥이언니와 나는 편지만으로 의자매를 맺었다. 나보다 세 살 위였다. 당시에는 유행처럼 X동생이나 X언니를 맺는 일이 흔히 있었다. 중학교 동급생 만이의 누나. 어떤 연유로 나와 의자매가 되었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우리는 서로에게 꽤 애틋했다. 만이를 통해 언니가 짠 장갑이나 방석 또는 목도리가 나에게 전달되었고, 나는 고맙다는 편지를 정성껏 써서 보냈다.
그러다 옥이언니를 처음 만난 것은 다음 해 이른 봄이었다. 알고 보니 언니의 큰언니가 우리 동네에서 십리쯤 떨어진 마을로 시집와 살고 있었다. 그녀가 바로 금이언니다. 봄바람이 아직도 찬기를 머금고, 들판에는 꽃다지가 찬바람에 한들거리던 날이었다. 우리 집에 처음 온 옥이언니를 따라 금이언니네 집에 갔다.
금이언니네 마을에는 버스가 다니지 않았다. 우리는 걸었다. 언니의 뾰족구두 뒤축이 자갈돌에 긁혀 벗겨졌다. 미니스커트 아래로 드러난 종아리는 팽팽했고. 조금은 불그레한 건강한 종아리를 보며 나도 얼른 언니처럼 자라 미니스커트를 입고 싶었다. 자갈 덮인 길을 걸어 우리는 무슨 이야긴지 끊임없이 주고받으며 걸었다. 둘이 손을 꼬옥 잡고. 맏이인 나는 막연하게나마 언니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때 처음 만난 옥이언니에게 내가 육친의 정 비슷한 것을 느낀 건, 소녀의 감성으로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었다.
조금 어둑해졌을 때 금이언니네 집에 도착했다. 산 밑에 낮게 엎드린 초가집이었다. 우리 집보다 더 작은 안방과 윗방에 부엌이 하나 있고, 뜨락에는 작은 쪽마루가 놓여 있었다. 쪽마루에 올라 문을 열고 들어가니 깊숙하게 내려앉은 방이 있었다. 집은 작았지만 깔끔했다. 반겨주는 금이언니 식구들과 함께 저녁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다 잠자리에 들었다. 옥이언니와 함께 누운 방은 옹색했다. 하지만 안온했다.
도란도란 끝도 없이 이야기를 나누었고, 하얀 창호지를 뚫고 들어오는 달빛이 우리의 이야기를 엿들었다. 바삭거리는 소리가 날 정도로 깔끔하게 풀 먹인 이불홑청, 꼭 잡은 손, 처음 만난 우리였는데, 이야기는 봄날의 해처럼 길고 길었다. 그러다 잠이 들었고, 부엌에서 들려오는 그릇 씻는 소리, 도마 소리에, 눈을 떴다. 아침이었다. 참새와 까치 짖는 소리가 평화로운 산마을을 깨웠다.
그 후 언니를 본 적이 없다. 만이는 졸업 후 소식이 끊어져 동창회에도 나오지 않았다. 이십 년 전까지 언니와 간헐적으로나마 소식을 주고받았는데. 어찌어찌하다가 소식이 끊어져버리고 말았다. 그즈음의 내 삶은 지독하게 힘들었다. 더구나 집안에 우환까지 겹쳐 모든 면에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언니 생각이 불쑥 날 때면, 막연하게나마 만이를 만나면 소식을 알 수 있으리라 믿었다.
몇 년 전에 만이가 불쑥 전화했다. 동창생을 통해 내 연락처를 알았다며. 나는 만이를 만나자마자 옥이언니 안부를 물었다. 만이는 가슴 아프니까 누나 이야기 하지 말자고 했다. 이유를 캐묻는 내게 한참 만에 툭 한마디 던졌다. “갔어. 이미 오래전에.” 만이는 그 말을 끝으로 옥이언니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왜 그렇게 되었냐는 물었지만 더 이상 묻지 말라며, 머그잔에 담긴 커피를 맥없이 저을 뿐이었다.
50년 만에 금이언니를 만난 것은 만이 아들의 결혼식장에서였다. 언니의 모습에서 어렴풋이 옥이언니의 모습을 발견했다. 크지 않으면서 따뜻해 보이는 눈, 오뚝한 콧날, 작은 입. 무엇보다 내 손을 잡은 따뜻하고 포근한 손. 퍼즐을 맞추듯 옥이언니의 모습을 금이언니에게서 찾고 있었다. 스스럼없이 다정하게 대하는 모습까지 둘은 닮았다.
금이언니를 통해 들은 언니의 삶은 무모하리만큼 순수했다. 종교생활에 심취해 금식을 밥 먹듯 했단다. 그 깨끗한 영혼을 가진 언니가 비워야 할 게 무에 그리 많아 금식을 그다지도 했을까. 툭하면 40일 금식을 하며 몸과 영혼을 담금질했다니. 달빛처럼 무구한 언니의 정신에도 그런 게 필요했을까. 가슴이 아파왔다. 큰 죄를 짓고도 죄인 줄 모르고, 남에게 상처를 주고도 자기 합리화에 급급한 게 우리 인간들인데. 안타까우면서도 아름다웠다. 언니의 그 순수한 영혼만큼은.
내 손을 꼬옥 잡고, 뾰족구두를 신고, 이른 봄바람을 맞으며, 자갈길을 걷던 언니. 그 모습이 실루엣으로 남아 지금도 눈앞에 어른거린다. 그리운 시절이다. 순수한 그 때다. 달빛 같은 영혼을 가졌던 옥이언니를 마음속으로 가만히 불러본다. 눈가가 촉촉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