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내리는 토요일 오후. 지인의 아들 결혼식에 다녀오며, 선배에게 전화했다. 그녀는 일주일 전 남편을 하늘로 보낸 처지였다. “언니, 뭐해요? 비 오는데 드라이브할까?” 좋단다. 20분 후 집 앞으로 가겠다고 했다. 다행히 목소리가 밝은 듯했다.
내가 십여 년 전부터 하는 일이 하나 있다. 가깝게 지내는 사람 중에 부모나 배우자를 하늘로 떠나보낸 사람을 살펴주는 일이다. 내 깜냥대로. 그건 식사 한 끼를 대접하거나, 드라이브하거나, 차를 마시거나,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주거나 하는 대수롭지 않은 거다. 그중 배우자를 보낸 사람과 꼭 밥 한 끼를 함께 먹으려고 한다. 한동안 먹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음이 그렇다는 거지, 이행하지 못할 때도 많다. 시간이 서로 맞지 않는 경우가 있어서다.
심리학자들은 말한다. 배우자를 잃는 게 무엇보다도 심한 스트레스라고. 선배의 남편은 6년 동안 투병했다. 그녀는 그 남편을 지극정성으로 보살폈고. 칠십 대 중반에 이른 그녀도 몸이 성치 않다. 암 수술과 허리 수술을 한 차례씩 해서 쇠약한 상태다. 그런 몸으로 남편 병시중을 했다. 가정경제가 넉넉지 않아 요양사 일까지 병행하며. 그 모습을 볼 때 감동적이었다. 그녀가 자기 앞의 생을 강한 의지로 헤쳐 나가는 듯해서.
결혼 후 분가해서 처음으로 살게 된 동네에서 그녀를 만났다. 내가 서른 살도 되기 전이었다. 그때 내 건의로 등산모임을 하면서다. 그녀는 학교 선배가 아니었지만 등산에는 선배였다. 우리나라 산이라는 산을 안 가본 곳이 없었다. 당연히 그녀가 대장이고 나는 총무였다. 회원은 여섯 명으로 시작했는데 열 명까지 늘었다. 서울 경기 강원권에 있는 산을 거의 다 정복했을 정도로, 한동안 열정적이었다. 각자 하는 일이 생기면서 시들해졌지만.
빗줄기가 약해졌다. 선배는 집 앞 길가로 나와 있었다. 내 차가 보이자 우산을 접은 그녀, 허리가 굽었다. 산에 한창 다닐 때 그녀는 날다람쥐 같았다. 어찌나 산에 잘 오르던지. 처음 등산을 시작한 우리를 차분하게 가르치고 인도했으며, 문제가 생기면 능숙하게 대처했다. 그때 얼마나 멋졌던가. 그랬던 그녀의 허리가 저리도 굽었다니. 칠십 대 중반이니 그럴 수 있겠으나 가슴이 아릿해졌다. 그동안 녹록하지 않은 삶을 허리가 증명하고 있는 듯했다.
“언니, 괜찮아요?” 차에 오른 그녀에게 물었다.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 외로 얼굴빛이 나쁘지 않았다. 점심을 먹었으니 드라이브가 좋겠단다. 남한산성 쪽으로 차를 몰았다. 비 맞은 나무는 녹음이 더 짙어졌다. 운무가 깔린 구불구불한 산성 길로 들어서자, 선배는 숨통이 트이는 것 같다며, 차창 문을 내렸다. 비가 조금씩 뿌리고 있는데도. 운전석의 창도 약간 내렸다. 산바람이 훅 끼쳐왔다. 우리의 얼굴을 어루만지면서.
차를 마시자고 했다. 싫단다. 그냥 어디든 이렇게 가잔다. 양평방향으로 향했다. 휴일인데 도로는 한산했다. 비 때문이리라. 선배는 생각보다 담담해 보였다. 저러다가 갑자기 울음이 터지는 수가 있다는 걸 잘 안다. 부러 경쾌한 대화로 이끌려고 노력했다. 옛날 산에 다니던 때 이야기를 꺼냈다. 그때 있었던 잊히지 않는 에피소드 몇 개는 두고두고 우리들에게 이야깃거리였으니까.
퇴촌을 지나, 수자원공사 본부 9층에 있는 전망대에서 한동안 남한강을 보았다. 풍광은 아름다웠다. 선배는 그것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그래도 물을 한참 쳐다보면 마음이 고요해지리라. 그녀는 간밤에 내린 비로 불어나 넘실대는 남한강을 말없이 보고 있었다. 야윈 얼굴, 초점 잃은 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싶었다. “언니, 힘들지요? 벌써 형부 그리워해요?” 약간 장난조로 물었다. 아니란다. 가시기를 잘했다고. 최선을 다했으니 큰 회한은 없다고. 다행이었다.
전망대에서 내려와 양평의 아름다운 벚꽃 길을 지나 ‘물안개 공원’에 차를 세웠다. 왼쪽으로 남한강을 끼고 가는 벚꽃 길은 내가 즐겨하는 드라이브 코스다. 지난봄 벚꽃 필 때 세 번이나 와서 벚꽃과 강물을 감상했던 곳. 중간에 있는 물안개 공원 역시 꼭 들러 걷던 곳이다. 비는 아직도 사부작사부작 내리고 있었다. 우산을 펴 들고 공원 내부로 들어갔다. 금잔화가 비를 맞고 있었다. 이팝꽃도 잔뜩 물기를 머금고 축 늘어졌다.
날다람쥐처럼 산을 누비던 선배는 조금 걷다 쉬었다. 숨이 찬단다. 삶의 현장을 훑으며 고단하게 산 흔적이리라. 세월 이기는 장사 없다지만 기가 막혔다. “언니, 이제 건강만 생각해요.” 흐르는 강물을 내려다보며 다리 중간에 서서 말했다. 그녀는 고개를 깊이 끄덕였다. 다시 가쁜 숨을 몰아쉰다. 바람도 차다. “그만 갈까요?”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물안개 공원 초입에서 돌이켜 주차장으로 왔다. 차에 올라 조금 쉰 후, 다시 또 차를 몰았다.
벚나무 늘어선 길을 천천히 달렸다. 천진암 입구에서 갑자기 그녀가 가곡을 부르기 시작했다. 나도 따라 불렀다. 남편을 보낸 지 일주일밖에 안 된 그녀가 노래를 부르니 약간 의아했지만 그건 즐거워서 부르는 노래가 아니었다. 가곡 동요 가요 닥치는 대로 부르던 그녀가 말했다. 이제 좀 후련하다고. 팔십 살 훌쩍 넘긴 남편이 숨 멎을 때 아주 평안했다고. 그녀가 남편에게 마지막으로 한 말은, 우리 이만하면 잘 살았잖아, 평안히 잘 가,라는 말이었다고. 그녀의 목소리에 물기가 스며 있었다.
“언니, 뭐 먹고 갈까요?” 아니란다. 다음에 먹잔다. 드라이브와 산책이 더 좋다며. 선배의 뜻대로 편하게 해 주었다. 나도 결혼식 마친 후 충분히 먹은 터였고. 100km는 족히 드라이브한 것 같았다. 그녀의 집 앞에서 그녀를 내려주었다. 내릴 때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오늘 드라이브 참 좋았고 고맙다고. 나는 다음에 맛있는 것도 먹자며 손을 흔들었다. 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었다. 서로의 마음을 알아주는 게, 서로의 마음 무늬를 읽어주는 게 중요하니까.
한동안 힘들 것이다. 인생지사 회자정리라 해도, 이별은 슬프기 때문이다. 영영 이별은 더욱. 집에 도착할 때까지 비가 내리다 멈추다 하더니, 햇살이 비쳤다. 그녀의 남은 삶에도 저렇듯 밝은 햇살이 비치기를 바라며, 차에서 내렸다. 때로는 드라이브도 위로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