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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뱀, 그 봄날의 풍경

사촌언니

by 최명숙

이맘때 뒷산 양지쪽에는 산나물이 많았다. 잔대, 미역취, 원추리, 고사리. 특히 여린 잔대 싹은 골짜기에 다복다복 났다. 진달래꽃 색깔이 옅어지고 파란 잎사귀가 피기 시작하면, 홑잎은 펴서 먹지 못했다. 칡넝쿨이 손을 뻗기 시작하고 찔레순이 빨갛게 올라오는 산은, 우리들의 놀이터였고 나물 밭이었다. 연둣빛으로 번져가는 숲, 따사로운 봄볕, 살랑살랑 부는 바람, 학교에 가지 않는 일요일은 물론이지만, 평일 오후에도 바구니를 들고 뒷산에 오르곤 했다. 산나물 뜯는 것도 놀이와 한 가지였으니까.


그날은 아마 일요일이었던 것 같다. 봄날 오전의 느낌이 확연히 기억나는 걸 보면. 봉화산 위로부터 떠오른 해가 하늘 한복판으로 가기 전, 남쪽으로 향해 있을 때였다. 사촌언니와 나는 뒷산으로 나물을 뜯으러 갔다. 낮은 날망 하나 너머에 사는 언니는 영리하고 똑똑한 데다 장난기와 웃음이 많았다. 그런 모습을 좋아하는 나는 언니와 자주 어울려 놀았다. 또 노래를 잘하고 글을 잘 써서, 원고지를 항상 옆에 두고 있었다. 라디오도 함께.

뒷산에 들어서자 노랑매미꽃과 애기똥풀꽃이 나지막한 구릉을 온통 뒤덮고 있었다. 꽃동산이었다. 떡갈나무 잎이 살금살금 피어나는 산자락에 훈풍이 불었다. 산비둘기와 박새들이 서로 화음을 맞추듯 노래하고, 이따금 꿩이 푸드덕 날아올라 우리를 놀라게 했다. 하늘은 푸르렀고 낮게 엎드린 마을 지붕은 평화로워 보였다. 색 바랜 진달래꽃잎을 하나 따 입에 넣었다. 단맛이 없어 휙 던졌다. 언니는 벌써 잔대 순 많이 나오는 골짜기로 부지런히 걸어가고 있었다. 나도 따라갔다.


햇볕이 까만 단발머리 위로 따갑게 쏟아져 내렸다. 어디에 무슨 나물이 많이 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었다. 연한 줄기를 뻗기 시작한 칡넝쿨을 헤치고 잔대 싹을 똑똑 끊었다. 싹이 무성한 것은 흙을 헤집고 뿌리까지 캤다. 칼로 겉을 긁어낸 후 도톰한 잔대뿌리를 씹어 먹으면, 달큼하면서 아삭아삭했다. 잔대 뿌리를 몇 개 더 캐서 바구니에 담고, 빨갛고 통통한 찔레 순이 눈에 띄면, 그것도 잘라 가시를 떼고 챙겼다. 동생들 줄 요량이었다. 집에 가면 동생들은 영락없이 나물바구니를 헤집어보리라.


나물 뜯고 찔레순 꺾기가 한창일 때였다.

“으악!”

나도 모르게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언니가 내 머리에 도마뱀을 얹어놓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몰랐다. 머리 위로 무엇이 슬금슬금 기어 다니는 것 같아 손을 대니, 차갑고 물컹한 것이 닿아 기겁했다.


“하하하……. 왜 무서워해? 도마뱀을 머리에 얹으면 공부 잘한대.”

언니 웃음이 뒷산을 흔들어댔고, 놀라는 내게 재밌는 듯 변명을 했다. 머리를 털며 소리 지르는 바람에 도마뱀은 떨어져, 어느새 숲 속으로 숨어버렸다. 얼마나 놀랐는지 울음이 나오지 않고 가슴만 벌렁댔다. 나물을 뜯고 싶은 의욕까지 사라졌다. 한참 동안 손발을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놀랐다. 울지 않은 건 언니가 하도 웃어대는 바람에 약이 올랐기 때문이었다.


산나물과 찔레순이 가득 담긴 바구니를 들고 숲에서 나와 산등성이에 앉았다. 나물 뜯느라 흘렸던 땀이 불어오는 산바람에 금세 식었다. 끝없이 흔들리는 노란 봄꽃들을 보며, 언니는 노래를 불렀다. 도마뱀 때문에 부아 났던 마음이 식어, 나도 따라 불렀다. 산 아래 집집마다 세워진 굴뚝이 정겨워 보였다. 멀리 신작로 찻길에 드문드문 버스와 트럭이 뽀얀 먼지를 날리며 지나갔다. 밭갈이하는 농부의 소모는 소리가 꾀꼬리 노랫소리와 어울렸다. 따사로운 봄볕을 받으며 점심때가 기우는 줄도 모르고 그렇게 산등성이에 앉아 노래를 불렀다.


산에서 내려오면 바로 우리 집 뒤란이다. 황매화가 가득 핀 울타리. 그 한쪽에 드나들 수 있게 터놓은 작은 개구멍. 그곳으로 언니네 집에 가곤 했다. 울타리 옆 황토를 바른 담벼락에는 동네 개구쟁이들이 해놓은 낙서가 즐비했다. 그 담벼락을 지나면 싸리나무로 해 단 우리 집 사립문이 있었다. 열어놓은 듯 닫은 듯 지그려진 사립문에 들어서면, 동생들은 어느새 달려 나와 나물바구니를 낚아채 헤집었다.


빨갛고 통통한 찔레순 껍질을 벗겨 들고 희희낙락하던 동생들. 나물을 헤치며 함함해하던 할머니의 모습. 눈에 선하다. 그리운 날이다. 열네 살 그리운 봄날의 풍경이다. 머리에 얹었던, 기겁해 떨쳐내던, 푸른빛 돌던 새끼도마뱀까지도 그리워지는 날이다. 언니의 그 장난스러운 웃음도. 그리고 봄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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