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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임선생님과 여덟 아이들

일상

by 최명숙

초등학교 때 담임선생님을 뵈었다. 남자아이 다섯, 여자아이 셋이서. 그래, 우리는 아이였다. 신체적으로는 육십 중반을 넘어가고 있는 나이지만 정신적으로는 초등학생 아이. 선생님을 만나니 모두 그렇게 돼버렸다. 몇 년 전, 우여곡절 끝에 찾게 된 담임선생님을 스승의 날을 맞이해 함께 뵙기로 했다. 여덟 명의 아이들은 흔쾌히 그러자고 했다.


사업 하는 ‘용’, ‘학’ 그리고 ‘승’, 공무원으로 퇴직한 ‘휘’, 다도에 조예 깊은 ‘미’, 교육계에 있던 ‘수’와 ‘화’, 그리고 ‘나’. 모두 여덟 명의 아이들은 선생님 만날 날을 기다렸다. 2023년 5월 12일 금요일 12시 30분. 우리가 약속한 날이었다. 퇴직을 한 몇 아이와 아직 일하고 있는 아이 모두 열일 제쳐놓고 시간을 냈다. 선생님을 뵙고 싶다는 마음 때문이었다. 나도 음식점을 골라 예약하고 꽃바구니를 맞추며 그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나와 화 그리고 용은 선생님과 특별한 추억이 있지만 다른 아이들은 그렇지 않은 것 같았다. 선생님께서 자기를 기억하실지 모르겠다는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럼에도 흔쾌히 함께 만나고 싶다는 그 마음들. 그건 아무것도 섞이지 않은 순도 100%의 순수한 마음이리라. 친구들의 그 순수한 마음이 나를 감동시킬 뿐이었다. 40년 동안 이곳저곳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셨던 선생님이 어찌 모든 아이들을 기억하시랴. 우리 모교만 기억하셔도 놀라울 일이다.


5월 12일, 드디어 디데이다. 미세먼지 없이 맑은 날이다. 소만(小滿)을 향해가는 신록은 은성하고 우리의 마음은 들떴다. 오고 있니? 우린 지금 거의 왔어. 학과 함께 오는 미의 전화다. 화와 내가 수의 자동차에 함께 타고 가며 이야기꽃을 피울 때였다. 화와 수는 초등학교 졸업하고 처음 만났는데도 스스럼없이 너니 나니 하며 깔깔 하하 웃었다. 50년 넘어 만나도 너나들이가 되는 건 초등학교 때 친구들뿐일 거다.


우리가 선생님 댁에 도착했을 때, 곱게 단장한 선생님이 나오셨다. 연분홍이 많이 섞인 모자는 시스루 느낌의 검은색 옷과 어울렸다. 진한 분홍색 립스틱도. 아, 선생님은 역시 멋쟁이시다. 센스 있게 입은 옷차림이 우리보다 더 어려 보일 지경이었다. 잠을 한 숨도 못 잤다고, 가슴 설레 제대로 먹지도 못했다고 말씀하셨다. 소녀 같았다. 이렇게 건강하고 멋진 선생님이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감성을 잃지 않고 사시는 것 또한 얼마나 다행인가.


선생님을 모시고 약속 장소에 도착했을 때, 몇 아이들이 와 있었다. 앉았던 자리에서 황급히 일어나 깊이 고개 숙여 인사하는 아이들. 방바닥이었다면 큰절이라도 했을 거다. 솔직히 내 눈에는 선생님과 제자들이 거의 친구처럼 보였다. 함께 나이 들어가고 있었으니까. 가슴이 뭉클했다. 대부분 졸업 후 처음 뵙는 것이었으니 50년도 훨씬 넘었다. 담임을 하신 것은 열 살 무렵이니, 기억에 남는 게 얼마나 있으랴.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했고, 정원을 산책했다. 아이들이 들떠서 여기저기로 흩어지자, 선생님이 주의집중이 안 된다고 하시는 바람에 박장대소했다. 선생님 포스가 그대로 나왔기 때문이다. 밖으로 나오니 우리는 완전히 초등학생이 되어버렸다. 옆에 담임선생님이 계시니 더욱. 선생님과 사진을 찍었다. 단체사진, 둘씩, 넷씩, 남자아이들과 선생님이, 여자아이들과 선생님이. 선생님을 가운데 놓고 수없이 셔터를 눌러댔다. 앞모습 옆모습 뒷모습까지. 아무것도 필요 없을 정도로 무념해지는 날이었다. 모두 그런 표정이었다.


다음엔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선생님께서 출간한 시집과 에세이집을 증정해 주셨다. 시인이면서 수필가인 선생님이 예쁘고 단정한 글씨로 미리 사인한 책이었다. 만나기 며칠 전에 참석할 아이들 이름과 하는 일에 대해 물으시더니, 책에 사인하려고 그러셨던 모양이다. 누가 말했다. 선생님의 재능을 받아 이어가는 수제자는 나라고. 그건 맞다. 4학년 때 내가 원고지에 쓴 글을 게시판에 붙여 작은 재능을 펼치게 해 주신 선생님이 아니던가.


담임선생님을 중심으로 우리들의 수다는 늘어졌다. 초등학교 시절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누가 어쩌고 저쩌고, 어느 선생님들이 연애를 했고, 점심시간이 어땠고, 운동회 때 무슨 일이 있었다고, 조잘조잘 재깔 재깔. 선생님께 일러바치듯 기억나는 것들을 이야기했다. 한 기업체를 통솔하는 사장이고, 교장이고, 원장이고, 교수고 다 필요 없었다. 우리는 모두 아이들일 뿐이었다. 선생님이 담임하셨던 꼭 그때 열한 살짜리 아이들.


하루해는 짧았다. 해가 서쪽으로 한참이나 기울었다.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또 선생님과 포옹을 하고, 아이들끼리도 포옹을 했다. 언제 다시 또 만날 수 있을까. 말로는 선생님을 자주 뵙겠다고 했다. 그게 예정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잘 알면서도. 마음만은 곧 다시 만나리라 다짐했으리라. 이제 또 졸업할 때처럼 뿔뿔이, 생활터전이 있는 곳으로 흩어져야 한다. 그곳에서 우리는 또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살아야 한다. 선생님의 가르침대로.


아이들과 헤어져 선생님을 댁에 모셔다 드리는 차 안에서, 내가 노래를 불렀다. 스승의 은혜는♩♪ 하늘 같아서 우러러볼수록♬……. 목이 멘다. 가슴이 뭉클해진다. 운전하는 수도 가만가만 따라 불렀다. 선생님은 뒷좌석에서 가만히 듣고 계셨다. 노래가 끝나자 선생님은 감격스럽다며 물기 묻은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아이들 모두 같이 불렀어야 하는데, 음식점이나 카페나 사람들이 많아 못했다. 하지만 노래를 불러드리고 싶었다.


친구들은 초등학생이 되었던 시간에서 모두 벗어나지 못하는 듯했다. 집으로 가는 길에도 전화가 이어졌고, 밤늦도록 단체 카톡방이 요란했다. 그날의 감상을 글로 적었고, 사진을 올렸다. 어디 그날뿐인가. 다음날까지도 그날의 감동이 이어졌다. 이제 자주 보자고, 선생님이 건강하고 고우셔서 참 보기 좋았다고, 한 말 또 하고 또 해도 마냥 좋기만 했다.


그토록 오랫동안 만나지 못하다 만나도 아이가 되고 말았던 건, 선생님이 계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저 선생님이 담임하시는 반 아이들이었으니까. 아이들. 육십 중반을 넘어서고 있어도 선생님 앞에서는 아이들 말이다. 선생님도 교직생활 40년에 이런 기쁨은 없었다고, 고맙다고, 아직도 흥분이 가라앉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 우리와 같은 마음이신가 보다. 어쩌면 더하셨을 수도 있다.


참으로 오랜만이지만 선생님을 뵐 수 있도록 자리를 만든 것은, 내가 잘한 몇 가지 일 중의 하나일 것 같다. 나도 뿌듯하고 행복했다, 무척. 어느새 벌써 선생님이 보고 싶고, 친구들이 보고 싶다. 열한 살 나이로 돌아가 아이들과 놀고 싶다. 수건 돌리기 하고, 숨바꼭질하고, 사방치기 하고, 자치기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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