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밌게 쓰자
한 친구가 말했다. 연애소설 하나 써달라고. 그러면 밤새워 읽을 것 같다고. 우리에게 이제는 로맨스 감정이 필요한 걸까. 사실 그건 언제나 필요한 것 아닐까. “좋아, 써줄게. 아주 달달하고 짜릿하게.” 모였던 친구들이 왁자하게 웃었다. 가능할까, 물론 가능하다. 아주 생각을 안 해본 것도 아니니까. 언젠가부터 연애소설 하나 쓰고 싶었다. 이참에 시도해 볼까.
또 한 친구가 말했다. 최 작가는 어려울걸. 너무 교조적이어서 말이야. 그렇게 살았잖아. 왜 선생은 돼 가지고, 그냥 작가로만 살았다면 가능했을지도 모르는데. 쯧쯧. 혀까지 차며 손사래 쳤다. “무슨 소리야! 나의 내면을 모르네. 난 언제나 연애를 꿈꾸며 살았다고. 나의 음흉함, 아니 멋을 알지 못할 뿐이지.” 높아진 내 목소리에 친구들은 또 시끌벅적하게 웃어댔다. 말도 안 된다는 듯 야유하며.
또 다른 친구가 말했다. 그래, 그럼 막장으로 한 번 써봐! 내가 그러면 적극적으로 홍보할 테니. 막장, 막장이라. 아, 본격문학을 해온 내가 그런 걸 쓸 수 있을까. 있다. 모든 장르에 대한 창작법의 기본은 돼 있잖은가. 못할 게 뭐야. 하면 하는 거지. 속에서 들끓어 올랐다, 창작 의욕이. “쓸 수 있어. 막장, 좋지! 내가 막장의 진수를 보여주겠어! 기다려, 딱 기다려! 6개월만.” 흰소리 쳤다. 이거 공수표 날리는 것 아닌가 싶으면서도.
한 친구가 조용히 미소 지으며 말했다. 최박은 힘들 거야. 우리 무리한 요구하지 말고 기다리자. 어떤 글을 쓰든 응원하며. 아, 저 친구! 멋지다. 왜 진즉에 알아보지 못했을까. 내 글 한 줄도 읽지 않는 남자와 나는 왜 결혼했을까. 그것도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무엇에 홀려서. 저런 친구와 결혼했어야 내 문학 행로가 평탄했을 것인데. 마누라가 책을 내는지 글을 쓰는지 무심하기 그지없는 남편과 결혼한 것이 원망스러워지는 순간이다.
한동안 이야기가 연애소설로 흘렀다. 육십 대 중반에 읽고 싶은 로맨스 소설, 친구들의 이야기를 조합해 본다면, 무조건 달달해야 한다. 그 달달함은 예전에 이미 소멸된 것들이리라. 꺼진 지 오래된 그 달달함을 찾고 싶은 걸까. 차라리 꿀물 한 사발 들이키는 게 쉬울 텐데. 그 소멸된 감성을 되찾고 싶은 욕망이 왜 그리 귀엽고 순수해 보이는 걸까. 아, 나도 그 달달함이 필요한 걸까. 쓰고 싶은 의욕이 생기는 것을 보면.
“그럼, 각자 연애 경험을 털어놓아 봐. 소재 준다 생각하고 말이야. 작중 인물의 이름을 절대 짐작 못하게 할 테니까.” 내 말에 친구들은 또 웃어댔다. 나쁜 것들, 웃기만 하면 다인가. 지들은 그렇게 던져놓지만 작가의 자존심으로 못한다고 할 수 없는 내 심정을 모른 체하고. 갑자기 제대로 된 연애 한 번 못해본, 심지어 선 한 번도 안 보고 결혼한, 나의 인생 궤적이 원망스러워졌다.
며칠 째 구상 중이다. 이미 써놓은 장편소설을 퇴고하면서도, 마음은 자꾸 연애 소설로 기울고 있다. 간접 경험이라는 것도 있으니, 꼭 직접 경험하지 않아도 된다. 서울 가본 사람과 안 가본 사람이 싸우면 안 가본 사람이 이긴다지 않는가. 결국 가공의 역사인데 글발이 좌우하는 거 아니겠나. 어느 작가는 소설 시작할 때 연애를 시작하고 소설이 끝날 때 연애도 끝낸다는 소문이 있던데, 믿거나 말거나 하는 이야기일까. 그렇다고 지금 연애를 시작할 수 없잖은가. 생각은 끝 간 데 없이 휘젓고 다닌다.
친구들은 왜 이 나이에 연애소설을 원할까. 하긴 연애가 필요한 나이가 젊었을 때보다 지금일지 모른다. 모든 게 심드렁해진 ‘지금’이니까. 사랑처럼 의욕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없을 테니까. 그렇다고 이 나이에 가정을 깰 일 없을 거다. 어쩌면 쫓겨날까 봐 전전긍긍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니 진정한 의미에서 ‘플라토닉 러브’가 가능하지 않을까. 한여름 대낮의 식물처럼 시든 육체의 소유자라는 것도 플라토닉 러브를 가능하게 하리라. 물론 절대 아니라고 말할 사람도 있을 테지만. 어쨌든. 아, 왜 갑자기 ‘은교’가 생각날까. 하지만 나는 그렇게 쓰진 않을 거다. 물론 ‘플라토닉 러브’로 규정하지도 않으리라. 그건 너무 작위적이니까. 작중인물이 이끄는 대로 가리라.
연애는 언제나 가능하다. 혹시 불륜이라는 단어를 먼저 떠올리는 독자가 없기를. 불륜을 먼저 떠올리는 건 재미없다. 그냥 연애다. 요즘 청년들은 연애를 하지 않고 ‘썸’만 탄다. 그건 연애가 비경제적이어서 그렇단다. 두 과목 이상의 강좌를 수강하는 것만큼 시간과 물질과 에너지가 드는 게 연애란다. 그래서 경제적인 썸, 연애 감정만 느끼는 그 썸만 탄다지 않던가. 썸은 비겁하다. 한번 터뜨려야지 변죽만 울리는 건 답답하다.
요즘 소설이 읽히지 않는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그건 묘사 특히 심리묘사가 많고, 의식의 흐름 수법 내지 새로운 표현기법을 써서 그런 것 같다. 우리 또래 독자에게 소설은 이야기라는 생각이 앞선다. 물론, 소설은 서사와 묘사에 의해 쓰이는 것이 보통이다. 요즘엔 묘사와 이미지 중심으로 소설을 쓰기 때문에 잘 읽히지 않는 듯하다. 시나 소설이 읽히기 위한 것보다 연구하기 위해 창작되는 것 같다는 말도 심심찮게 들린다. 내 생각은 예나 지금이나 같다. 소설은 재밌어야 한다는 것. 그러려면 특히 연애소설을 써야 한다.
재밌게 쓰고 싶다. 친구들의 바람대로 연애소설을. 지금까지 내가 쓴 책의 독자가 되고 수요자가 되었던 친구들이 원한다는 것은, 어쩌면 일반적인 독자가 원하는 것일지도 모르니까.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 소설을 쓴 김만중 선배처럼, 나도 벗들을 위로하기 위해 달달한 연애소설 한 편 써야 할까. 낡고 닳아가는 감성을 붙잡으며. 아,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연애소설, 쓸까 말까. 사실은 고민 중이다. 소설가라는 이름을 갖고 있으면서 못 쓴다고 할 수 없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