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악회, 그녀들
우리는 이삼십 대에 만났다. 등산모임으로. 이름도 평범하다. ‘메아리 산악회’. 물론 발기인이면서 총무인 내가 지은 이름이다. 스물아홉 살 이맘때였다. 한 동네에 살면서 안면 있는 한두 사람에게 산에 다니겠느냐고 의사를 물었고, 그 한두 사람이 친한 사람을 데리고 들어왔다. 여섯 명이 첫 산행을 하면서 등산 모임이 만들어졌다.
우리는 그 모임을 오 년 정도 지속했다. 회원이 바뀌고 더 늘고 하면서. 나는 유아교육기관을 설립해 운영하며 바빠졌고, 다시 또 공부를 시작해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했다. 다른 회원들도 사회활동과 집안일로 분주해 산행을 자주 못하게 되었다. 그래도 어찌어찌 명맥을 유지하다, 멀리 이사 가는 사람이 생기고, 모두 바빠지는 바람에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유명무실한 메아리 산악회.
수십 년, 그저 경조사나 챙기다가 육칠 년 전에 다시 뭉쳤다. 어제의 용사들이. 반도 더 줄어든 네 명이다. 왕언니, 회장, 대장, 총무였던 나. ‘왕언니’는 지금 평생 해온 미용기술로 봉사활동하며 행복한 노년을 보낸다. ‘회장’은 택시 운수업에 종사하고 있다. 여장부다운 모습을 유감없이 발취하며. 전국 산이라는 산 안 가본 곳이 없는 ‘대장’은 그때 산을 누비던 그 저력으로 성실하게 살고 있다. 총무였던 나는 메아리가 재결성된 지금도 총무다. 따지고 보면 핵심요원은 다 있으니 모두 있는 셈이다.
우리는 모두 육칠십 대가 되었다. 막내인 나와 왕언니까지 십 년을 사이에 두고. 그 십 년 안에 다 들어 있다. 현재 나만 빼고 모두 칠십 대 나이다. 그래도 모두 건강하다. 사십 년 가까이 유지해 온 우정, 아이들이 자라는 것을 모두 지켜보았고, 힘들었던 날들을 서로 기억해 주는 사람들. 동기간보다 더 가깝다면 가까울 수 있는 인연들이다. 그 모임을 다시 불러온 것은 나다. 떨어져 지내며 서로 그리워만 하는 게 안타까웠다. 소식 끊어진 왕언니를 어렵사리 찾아냈고, 재결성한 것이다. 나는 FBI요원이 돼도 됐을지 모른다. 사람 찾는 데 명수니까.
이제 우리는 산행을 하지 못한다. 허리와 다리가 아파 걸음이 원활하지 않은 회원이 있기 때문이다. 한두 달에 한 번씩 만나 식사를 하고 차를 마신다. 아주 가끔 여행도 한다. 그만해도 모두 만족해한다. 허물없는 사이라서 무슨 말을 해도 상관없다. 다 이해한다. 나는 막내다. 시집에서나 친정에서나 맏이라서 알게 모르게 중압감이 있다. 어디서나 선생으로 자리해 있으니 그것도 늘 부담이다. 이 모임만은 그렇지 않다. 자유롭다.
어제 우리 넷이서 주문진으로 떠났다. 회 먹으러. 물론 그게 목적 아니었다. 남편을 떠나보낸 ‘대장’을 위로하는 나들이였다. 아침 일찍 합체가 된 우리는 ‘회장’이 운전하는 밴에 올랐다. 도로는 시원하게 뚫려 있었고, 차 안의 우리 수다는 끊이지 않고 시원하게 계속되었다. 바깥으로 보이는 풍경, 풍경들. 검푸르게 녹음이 깊어지고 있는 산, 저 산에 모두 날다람쥐처럼 오르던 날이 있었는데.
두 시간 남짓 지났을까. 벌써 바다가 보였다. 비가 온다더니 날이 좋았다. 주문진항에서 회를 고르고 흥정을 했다. 그 재미다. 횟집에 들어가 먹는 것도 좋지만 직접 고르고 흥정하는 것. 광어와 돔, 덤으로 얻은 한 마리에 두 마리 더 산 오징어. 떠서 들여온 회 접시 두 개를 보고 입이 떡 벌어졌다. 저걸 누가 다 먹을까 싶어서. 기우였다. 차 안에서 왕언니가 싸 온 떡과 간식을 먹었건만, 회 들어갈 배는 따로 있었나 보다. 순식간에 해치우고 매운탕에 공깃밥까지. 아, 위는 나이에 맞춰 커가는 걸까. 건강하다는 의미리라.
해안도로를 따라 낙산사에 들렀다. 언제나 그렇듯 풍광이 아름다운 낙산에서 사진 몇 장을 찍었고, 낙산사로 들어갔다. 의상대에 앉아 맞는 바닷바람. 홍련암에 이르는 길에 핀 해당화와 붓꽃. 내려다보이는 푸른 바다. 멀리 뜬 배 한 척. 시원한 바닷바람. 곳곳에 달린 고운 연등. 불자인 대장과 회장언니는 차마 절에 들어갈 수 없다며 의상대 앞에 앉아 있었다. 회를 먹었기 때문이란다. 왕언니와 나만 손을 잡고 홍련암에 다녀왔다.
돌아가는 길은 한계령을 넘어 국도로 가자고 했다. 모두 좋단다. 일찍 떠나 시간이 넉넉했다. 해가 긴 오월이니 더욱. 역시 한계령이다. 운무가 걸쳐졌다 벗겨졌다 하는 한계령은 장관이었다. 누군가는 중국의 장가계보다 낫다고 했고, 누군가는 아름답기로는 설악이 최고라고도 했다. 역시 우리나라 산이라고 감탄하며 한계령 정상에 다다랐다. 회를 하도 많이 먹어 배부르다면서도 옥수수와 대추생강차를 마셨다. 나는 한동안 소식하면서 습관이 되었는지 아주 배부르게 먹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산자락을 건너다보며 마시는 대추생강차의 달달하고 알싸한 맛이 일미였다.
원통과 인제를 거쳐 홍천과 양평으로 이어진 국도를 지났다. 그 긴 행로처럼 우리의 수다는 이어졌고, 조금도 끊이지 않았다. 웃고 떠들고 손뼉 치고 그러는 과정에서 노래도 빠지지 않았다. 가곡으로 시작해 가요와 동요까지. 한 사람이 시작하면 합창으로 이어졌다. 누가 밖을 보며, 찔레꽃이 피었다고 하면,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 나라 내 고향으로 시작하는 노래로 이어졌다. 누가 또, 산에 나무들 좀 봐 하면, 산에 산에는 산에 사는 메아리 언제나 찾아가서 외쳐 부르면으로 시작하는 동요를 불렀다. 그러다 와르르 웃었다.
왕언니네 동네 근처에서 저녁으로 칼국수를 먹었다. 웃고 노래하느라 에너지가 소진해서였을까. 칼국수가 맛있었다. 참 많이 잘도 먹는다면서도 우리는 먹고 또 먹고 웃었다. 누군가는 한 달에 한 번씩 여행하자고 했고, 누군가는 그건 너무 힘들 거라며 한 계절에 한 번씩 하자고도 했다. 나는 다 좋다며 웃었다. 말이 쉽지, 한 달에 한 번씩 절대 못할 테니까. 우리의 일상이 그렇지 않은가. 마음먹은 대로 흘러가지 않잖은가.
아쉬움 없이 즐긴 하루, 꼭 12시간 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메아리 산악회, 메아리로만 남은 산악회지만 이렇게 친목 모임 만으로라도 지속되기를 바랄 뿐이다. 그러니까 이름을 잘 지었어야 한다. 메아리라고 하니까 메아리로만 남은 산악회가 되고 말았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하지만 이 친목 모임은 메아리로만 남지 않기를. 아니, 메아리처럼 오래오래 여운이 남는 모임이 되기를.
자리에 누워 잠을 청하니 바다와 한계령이 어른거렸다. 아직도 나는 그곳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