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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는 길 풍경, 풍경들

일상

by 최명숙


치과 치료는 쉽게 끝났어. 걱정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 통증이 있으면 어쩌나 시리면 어쩌나 걱정이었는데. 의사는 친절했어. 오늘은 금방 끝났어요, 아프지 않으셨죠? 나는 고맙다고 괜찮았다고 말했지. 지난번 일 다음부터 살갑게 대하는 의사. 고기를 씹어야 맛이고 말은 해야 하는 게 맛이야. 맞아. 불편했던 점을 말한 것은 잘한 일이지. 신경 치료도 이제 막바지에 이른 것 같아.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다른 길을 택했어. 개울가 산책로가 아니라 도로변이었어. 이유는 있지. 나는 갔던 길을 다시 오는 게 싫어. 등산을 해도 갔던 길로 다시 오긴 싫거든. 여행을 해도 그래. 변화를 추구하는 건강한 생각이라고 봐. 아닌가. 어떤 이는 익숙한 길로 다니는 게 편하대. 모두 생각이 다를 수 있으니까 그깟 일에 너무 의미 부여하지 않을래. 찻길을 따라 걷는 길을 선택한 건 그래서야.


왕복 팔 차선 도로에는 각종 차량들이 연락부절이었어. 굉음을 내며 달리는 차도 있었지. 다행히 매연은 없었어. 햇볕이 쨍쨍 내리쬐고 있어서 그늘을 이용해 걸었지. 가로수 그늘과 높은 건물 그늘, 횡단보도 입구에 펼쳐놓은 파라솔 그늘 등이었어. 모자도 썼지. 며칠 전에 산 건데 아주 얇고 가벼운 여름용 모자야. 색깔은 연한 카키색. 건물 거울에 비췬 내 모습을 흘깃거리며 보았지. 아직은 괜찮게 보였어.


아, 푸드 트럭이 보여. 삶은 옥수수를 팔고 있네. 두 개 묶어 3,000원. 샀지. 옥수수는 뜨끈뜨끈했어. 먹고 싶지만 길에서 먹을 수 없었어. 손에 들고 집으로 향하는데, 왼쪽으로 조붓한 오솔길이 나오는 거야. 앞산으로 올라가는 입구. 잠시 멈칫했지. 집에 가서 옥수수를 먹을까, 앞산에 올라갈까. 앞산에 가본 적이 오래되었다는 것을 떠올렸어. 앞산의 풍경은 어떨까 싶었지. 산을 올려다보았어. 하얗게 핀 꽃이 저만큼 보이는 거야. 앗, 뭐지? 저건 쪽동백 같은데. 그 꽃이 내게 손짓하는 듯했어.


한 걸음 한 걸음 오솔길을 따라 올라갔지. 맞아, 쪽동백이었어. 조로로록 줄지어 핀 하얀 꽃이 앙증맞아 사진을 한 컷 찍었어. 떨어져 땅에 누워버린 꽃도 있지 뭐야. 앞산에 올라오지 않았다면 쪽동백이 핀 것도 모를 뻔했어. 자연은 누가 보든 안 보든 자기가 할 일을 묵묵히 하고 있어. 자연이 아름답고 숭고한 것은 그래서일지 몰라. 쪽동백 앞에 서서 한참 꽃을 감상했지. 뒷산에는 때죽나무꽃도 피었을 것 같아. 팥배나무꽃도. 내일은 뒷산에 가서 그 꽃들도 보리라 다짐했어.


앞산 정상에는 정자가 하나 있어. 그 정자를 중심으로 넓게 원을 그리며 산책로가 만들어져 있지. 사람들이 걸어 다녀서 저절로 만들어진 거야. 몇 사람만 다니면 길이 만들어진다는 게 맞아. 옥수수 봉지를 들고, 작은 크로스백을 몸에 걸치고, 카키색 모자를 쓰고, 산길을 걷는 모습을 상상해 봐. 자유인 같지 않아? 하고 싶은 대로 할 거야. 내 마음이야. 누가 뭐라고 하지 않는데, 혼자 중얼거렸어. 내가 생각해도 안 하던 짓을 하는 게 우스웠기 때문이야.


세 바퀴를 돌았어. 정자 가까이 갔지. 기막힌 일을 목격했어. 정자에 깔린 마루가 반짝반짝 빛이 나고 있었어. 입구에 놓인 걸레도 눈부셨어. 하얀 것이 우리 집 행주보다 더 깨끗해. 누가 저 마루를 닦았는지 알 수 없지만 닦는 이가 있다는 증거야. 운동화를 벗고 마루로 올라갔어. 그러기 전에 먼저 손으로 바닥을 쓸어보았지. 손에 아무것도 묻어나는 게 없어. 흙먼지 하나도. 망설이지 않고 마루에 올라가 앉았어.


산들, 산바람이 불었어. 향긋한 내음이 풍기는 거야. 작은 아까시나무에 핀 하얀 꽃이었어. 배고플 때 따먹던 그 아까시꽃. 아카시아가 아니고 아까시가 맞는 이름이라잖아. 처음에 아카시아로 쓰니까 그게 맞는 것처럼 된 거래. 아까시로 쓰니까 어색하네. 그래도 틀린 것을 쓸 수 없잖아. 아카시아와 아까시는 수종이 다르대. 우리나라에 있는 나무는 아까시가 맞는다잖아. 맞는 이름을 쓰면서 왜 이렇게 설명을 길게 하는 걸까. 틀린 걸 바로잡는 게 쉽지 않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지.


아까시 향기 때문인지 갑자기 식욕이 돋아. 아침도 걸렀잖아. 옥수수를 꺼냈지. 아직도 따끈따끈한 삶은 찰옥수수. 하나 꺼내 반을 잘라 알갱이를 따서 입에 넣었어. 톡톡 입 안에서 터지며 달큼한 맛이 났어. 단 것을 가미해 약간 인위적인 맛이긴 해도 아주 괜찮았어. 아까시꽃 향을 맡으며 옥수수를 먹을 때였어. 지나가는 나이 든 여자가 나를 흘깃 보았지.


이거 같이 드실래요? 반 남은 옥수수를 쳐들고 물었지. 여자가 싱긋 웃는 거야. 맛이 좋은데요. 지금 새참 때는 된 것 같아요, 오시죠. 재차 권했어. 새참이라는 말에 끌렸던 걸까. 여자도 정자 마루로 올라왔어. 내가 건넨 옥수수를 받으며. 누가 이렇게 닦았을까요? 참 깨끗해요. 우리 집 거실보다 더. 쓸데없는 말까지 했어. 뭐 그런 거야. 꼭 쓸 말만 해야 한다는 법 없잖아. 가끔 헛짓거리 좀 해도 돼. 딸이 옆에 있었다면 기겁했을 테지만.


여자와 나는 옥수수를 함께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지. 친구처럼 스스럼없이. 먹는 걸 나눠 먹어서 그럴까. 이만큼 사니까 거칠 게 없어서 그럴까. 여자는 딸네 집에 아기 봐주러 와 있대. 고향에서 남편 혼자 농사를 짓는다며, 지금 집에 갈 수도 안 갈 수도 없는 상황이래. 육아 이야기 나오니까 나도 할 말이 많았지. 여자도 딸 생각하면 아기를 더 봐줘야 하고, 남편과 농사 생각하면 집으로 내려가야 하는 입장이라는 거야. 우린 육아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다 한탄만 늘어놓았지. 그러다 여자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어. 이 마루 두고 가기 아깝다면서.


쪽동백 앞에 두 개 갈림길이 있었지. 여자는 왼쪽으로 나는 오른쪽으로 내려가는 길을 택했어. 거기서 헤어진 거야. 우리가 무슨 인연이 있기에 잠시 그렇게 만났는지 모르겠지만 만남이라는 것 자체가 다 소중해. 내려오다 보니 후박나무꽃이 소담하게 피었지 뭐야. 아까 올라올 때는 쪽동백만 보였는데. 올라갈 때 풍경 다르고 내려올 때 풍경 다른 거야. 후박나무 앞에서 또 잠시 감상했어. 아름다운 걸 그냥 지나치긴 아쉽잖아.


애기똥풀꽃과 붓꽃이 환하게 웃는 길을 따라 내려왔지. 바로 아파트 입구가 보였어. 우리 동네가 이렇게 나무와 꽃이 많고 다양하게 핀다는 걸 새삼 느꼈지. 쌍둥이를 태운 유모차가 막 아파트 입구로 나오고 있었어. 저 쌍둥이 역시 꽃이고 꿈나무겠지? 나도 꽃은 꽃이야, 갈대꽃 같은 꽃이라도. 아니 소박한 냉이꽃이라고 해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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