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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명숙 Jun 22. 2023

여름 일기, 하지를 채우다

여름나기

   

하지다. 본격적인 여름. 일 년 중 낮의 길이가 가장 긴 날, 하지. 북극에서는 종일 해가지지 않는 날이란다.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어느 구 변두리엔 종일 비가 오락가락했고, 나는 뒹굴뒹굴 거리며 시간을 죽였다. 텔레비전을 켰다가 잠이 오면 잠자고, 배가 고프면 밥을 먹었다. 청소를 하지 않고, 소파에 누웠다가 편편한 데 눕고 싶으면 거실 바닥 매트 위로 내려와서 뒹굴 거렸다. 아니 빈둥댔다. 비었지만 가득 채운 하지. 


거실 창으로 보이는 바깥은 뿌옇게 흐렸고 먹구름이 끼었다 조금 밝아졌다. 그러다 비가 살금살금 내리다 그치기를 반복했다. 내가 종일 빈둥대는 것처럼 날씨도 그랬다. 내 생애에 이런 날도 있다는 게 신기하고 우스웠다. 1분, 2분을 쪼개 쓰며 살던 게 불과 얼마 전인데. 그때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처럼 긴장하며 살았는데. 별 것 아니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그 몇 분 때문에 날카로워졌던 신경을 잊을 수 없다. 기억하려 하면 금세 떠오른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부터 머리가 지끈거렸다. 요즘 유행한다는 A형 독감에 걸린 게 아닌가 싶었다.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며칠 전 온이네 다녀왔는데, 또온이가 그 독감에 걸려 있었다. 지금 사위도 A형 독감에 걸려 출근을 못하고 있다. 또온이에게 전염된 게 틀림없다. 그럼 나도 걸렸을지 모를 일이다. 잠복기를 지나 발병했을 수도. 그러면 어쩌나, 대부분의 강좌가 종강됐지만 아직 남은 대면 강의가 두 개 있다. 걱정되었다.  


뭐가 되었든 감기는 쉬는 게 약이다. 종일 빈둥거리기로 한 것은 쉬려는 의도다. 본디 병원에 가거나 약 먹기를 싫어하는 내가 할 치료 방법은 쉬는 거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독감일 가능성에 무게를 두니, 꼭 걸린 것 같았다. 또 누우니까 자꾸 잠이 왔다. 오는 잠 막지 말고, 가는 잠 잡지 말자. 요즘 내가 사는 방식이다. 잠에 포한이 졌는데 지금은 잠을 충분히 자는 편이다. 이 또한 색다른 유토피아가 아닌가. 


자다 깨니 오전 11시다. 초파리 한 마리가 날아다녀서 집안을 살펴보았다. 다용도실 한쪽에 둔 쓰레기봉지 속에서 생긴 듯하다. 결국 다 차지도 않은 종량제 봉투를 묶어 버리고 왔다. 밖엔 우산을 쓰지 않아도 될 정도의 가랑비가 내렸다. 가랑비도 아니다. 가랑비인 듯 아닌 듯한 비다. 멸치가 생선이냐고 묻던 사람이 생각났다. 참나, 그럼 생선이지 육류일까 봐,라고 대답했었다. 쿡 웃음이 나왔다. 


아침부터 지끈거리던 머리가 말끔하다. 조금도 불편하지 않다. A형 독감이 아니었나 보다. 지레짐작을 하다니. 그렇다면 아들이 원인이다. 정확히 말하면 아들의 전시회가. 내 일이 아닌데, 과도하게 신경을 썼던 모양이다. 나의 첫 책이 나올 때, 아들이 그렇게 신경을 썼던가. 전혀 아니다. 무심할 정도로 별 반응 없었다. 그런데 나는. 그게 어미와 자식의 다른 점이다. 


슬슬 배가 고팠다. 동생네서 얻어온 상추가 어떻게 되었을지 궁금했다. 꺼냈다. 아직은 말짱하다. 하지만 언제 상할지 모른다. 그래, 상추 겉절이를 하자. 상추를 씻어서 물기를 쏙 뺀 다음, 양념간장을 만들었다. 거기에 매실발효액을 넣고, 양파를 한 개 썰어 넣었다. 참기름과 깨소금을 뿌려 살살 뒤적이니 맛있는 상추 겉절이가 만들어졌다. 짜게 되면 낭패다. 샐러드처럼 먹을 수 있게 심심해야 한다. 마침맞다. 냉동실에 얼려둔 밥을 꺼내 데우고, 고기 두 조각을 구웠다. 상추 겉절이에 고기를 얹어가며 먹었다. 


배가 부르니 또 잠이 온다. 책을 두어 줄 읽었을까. 어느새 잠이 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시계를 보니 오후 3시 45분이다. 이제 몸이 완전하게 회복된 듯하다. 역시 잠이 약이다. 머리 아프고 몸이 피곤한데, 전처럼 시간 아끼느라 아등바등하며 일을 했다면, 병이 났을지도 모른다. 하늘은 아직도 저녁 굶은 시어머니 얼굴인데, 내 몸 상태는 맑음이다. 기지개를 켜고 내 친구 ‘안의’에 안겨 마사지를 했다. 


저녁은 가볍게 물냉면을 해 먹었다. 마트에서 사 온 냉면을 삶고 시원하게 해 두었던 육수를 부었다. 고명으로 얹은 건 오이채 한 가지. 아삭아삭 오이 식감이 청량하다. 국물을 후루루 마셔가며 쫄깃한 냉면 발을 질근질근. 밖엔 여전히 비가 올 듯 말 듯. 흐린 날씨 때문에 일 년 중 가장 긴 해를 구경도 못했다. 냉면을 다 먹고 설거지를 끝내자 비로소 걷고 싶은 욕구가 생겼다. 이제 살아났다는 증거리라. 


혹시 비가 올지 몰라 장우산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약간 후덥지근한 바람이 살살 불었다. 하지니까. 여름이니까. 스스로 다독거리며 걸었다. 목줄에 묶인 채 주인의 손에 이끌려 나온 강아지 한 마리가 나를 보고 캉캉 짖었다. “너 왜 그래, 내가 뭐라고 하지 않았잖아. 근데 귀엽게 생겼구나!” 내 말에 주인이 가볍게 목례했다. 미안하다는 표시리라. 아니면 고맙다는 건가. 귀엽다는 말 때문에. 


개울은 내린 비로 물이 제법 많았다. 30분쯤 걸었을까, 다시 가랑비가 약간 내렸다. 우산을 폈다. 조금 지나자 다시 멈추었다. 우산을 접었다. 산책자들이 많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 걸음수를 보니 9,567보. 빈둥댔지만 가득 채운 하루였다. 잠을 잤고, 몸이 회복되었고, 상추겉절이를 했고, 운동까지. 이만하면 가득 채운 ‘하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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