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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명숙 Jun 23. 2023

주유소도 해우소다

그래도 가끔 확인하자 

     

딸네 집에 갈까 말까 갈등하다가 나섰다. 도로 상황 검색을 하니 아주 좋다. 막히는 구간이 전혀 없다. 공휴일이라 많은 이들이 도시에서 떠났나 보다. 그렇다고 계속 그런 것은 아닐 터다. 갑자기 조급한 마음이 들었다. 막히지 않을 때 어서 가야 한다는 마음이. 마치 달리는 도로에서 신호등이 초록불일 때처럼. 그때도 나는 조급한 마음이 들곤 했다. 시동을 걸었고 달리기 시작했다. 


청담대교를 건널 때 자동차 주유 경고등을 보았다. 아차! 엊그제 주차할 때 주유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잊었다. 근처에 주유소가 없다. 동부간선도로로 접어들었다. 이제 목적지 근처까지 갈 수밖에. 문제는 그때까지 갈 수 있느냐 없느냐다. 남은 유류로 몇 킬로미터 더 갈 수 있을까. 표시되는 버튼을 눌러보았다. 28km. 딸네 집까지 대략 23km 남았으니, 5km 여유가 있다. 표시등에 나온 대로라면. 


하지만 맞지 않을 수 있다. 갑자기 들은 이야기가 생각났다. 그렇게 똑떨어지게 맞지 않는다는 판매원의 말이.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등에 땀이 나고 이마에도 났다. 불안하면 생기는 증상이다. 첫 강의 때도 그랬고, 내비게이션 사용하는 게 보편화되지 않았던 시절, 낯선 여행지에서 길을 잘못 들었을 때도 그랬다. 또 시간에 쫓기게 될 때도. 온몸에서 땀이 줄줄 흐를 정도로 긴장하고 불안감을 느꼈다. 


동부간선도로를 달리는 동안,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막히는 구간 검색을 했고, 그곳이 없다는 사실만 인지해, 주유 경고등을 살피지 않다니. 서두르면 문제가 생기는 법인데, 왜 그랬을까. 늘 막히는 동부간선도로 상황, 그것이 막히지 않는다는 사실만 부각해 준비 없이 나선 것이 문제다. 아무리 후회해도 소용없는 짓이다. 이제 무사히 어느 주유소 앞에든 가야 한다. 그러기만을 기도해야. 기도한다고 될 노릇일까. 그렇게 설렁설렁 행동한 적이 없는데, 왜 또 그랬는지. ‘또’다. 


예전에도 그런 적이 있다. 딸이 결혼하기 전이었다. 사위를 데리고 왔다. 외할머니, 내 친정어머니께 인사시키고 싶다며. 사위에게 운전시키기 마뜩잖아 내 차로 가기로 했다. 그때는 ‘소냐’였다. 소냐에 온 식구가 타고 친정으로 가는데, 그때도 주유 경고등이 들어왔다. 며칠 전부터 들어왔다는 것을, 고속도로에서 떠올렸다. 낭패다. 설상가상으로 도로는 꽉 막혀 있었다. 오월 연휴였다. 가정의 달을 맞은 연휴는 사람들을 집에 머물게 하지 않았다. 


정지하고 있는 동안 시동을 껐다. 처음에는 기어를 중립으로 했는데, 정체가 언제 풀려 휴게소까지 갈 수 있을지 알 수 없는지라, 차라리 시동을 끄는 게 나았다. 시동을 껐다가 조금이라도 달릴 수 있을 때 다시 걸고, 중립을 했다가 다시 끄고, 다시 걸고. 마음은 타들어갔다. 준비성 없는 사람도 아닌데 왜 그런 실수를 저질렀는지 후회막급이었다. 그렇다고 불안한 마음을 내색할 수 없었다.  


그때도 온몸에 땀이 흘렀다. 그만큼 긴장하고 있었다. 에어컨을 켜지 못하고 창문을 열고 달렸다. 내막을 알지 못하는 딸은 에어컨을 켜달라고 했다. 또 왜 자꾸 시동을 껐다 켜느냐고 차에 문제가 있느냐고도. 기름이 고갈되고 있어 그렇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러면 모두 불안할 테고, 준비성 없는 어미로 비치는 것도 싫었기 때문이다. 아직 서먹서먹한 사위만 아무 말 없이 바깥을 바라보았다. 아마 사위는 눈치챘을지 모른다.


간신히 휴게소까지 운행할 수 있었다. 그때까지 버텨준 소냐, 지금 생각해도 기특하다. 휴게소에 가자마자 주유했다. 다시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다는 다짐을 하며. 그랬는데, 그랬는데 잊다니. 그리고 또 같은 일을 저지르다니, 내 사전에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자책을 넘어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운행 중 서게 되면 보험회사로부터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그것을 모르지 않는다. 그러려면 시간이 지체되고 부가적인 조치가 따르게 될 터다. 그런 일련의 과정을 꺼리는 나다. 


내 차 ‘프린’도 ‘소냐’처럼 무사히 주유소에 도착해 주었다. 남은 주유량으로 얼마나 더 갈 수 있는지 알려주는 버튼을 눌러보았다. 6km. 프린의 보통 연비가 23km인데, 그렇다면 얼마나 고갈되고 있는지 알 것 같다. 아마 기름이 바닥에 있는 둥 마는 둥 하는 정도. 아, 미안했다. 온 힘을 다해 달려온 프린 또한 기특했다.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꺾일 듯한 허리를 곧추세우며 안간힘으로 걷던 날도 떠올랐다. 프린이 꼭 그날의 나처럼 그랬으리라. 


가득 주유했다. 걱정이 사라졌다. 불안감도 물론. 온몸에 흐르던 땀이 서서히 멈추었다. 그러고 보니, 주유소도 해우소다. 해우소만 해우소가 아니다. 다짐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으리라고. 미리미리 준비하리라고. 준비하지 않으면 불안한 일을 겪을 수 있으니까. 아무리 인간은 불안감을 안고 사는 존재라 해도, 이런 불안은 불가항력적인 것이 아니라 자초한 것이다. 적어도 자초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요즘 차에 오르면 주유량을 자주 살핀다. 현대인 아니 인간으로서 겪는 근원적인 불안이야 어쩔 수 없다 해도, 자초할 필요 없으니까. 사소한 행동 하나가 불안감과 직결될 수 있다는 걸 다시 깨달았으므로. 어제도 차에서 내릴 때 주유량을 확인했다. 823km. 한동안 나는 주유 걱정 없이 운행할 수 있다. 그래도 가끔 확인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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