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는 신선하다
샌들을 샀다. 노란색으로. 베이지색이나 검은색이 무난하겠지만 색다른 것으로 사고 싶었다. 잠시 갈등했다. 가지고 있는 옷 색깔에 어울릴까. 무슨 상관이랴. 그냥 마음 내키는 대로 했다. 잠시 한 갈등은 고정관념을 깨는 데 있을 법한 일이다. 이만한 일에 고정관념까지 운운하는 건 과장이겠으나, 지금까지 하던 것과 다른 것이니 고정관념이 맞긴 하다. 아무튼 노란색 샌들을 샀다.
노란색이라고 하나 아주 샛노랗지 않다. 파스텔 톤의 연노랑에 가깝다. 노랑과 아이보리색을 섞은 듯한. 그래도 이런 색깔의 구두나 샌들을 신어본 적 없다. 검은색 아니면 베이지색 또는 갈색 계통이 대부분이었다. 무난하고 도드라지지 않는 색깔. 옷이나 신발이나 가방이나 모두 무채색 계통이다. 직업상 그런 색을 선택하는 게 자연스러웠다. 체형 때문일지도 모른다.
뜬금없이 노란색 샌들을 산 것은 그렇게 고정된 의식에서 벗어나고 싶은 무의식의 발현일까. 내 속에 어떤 것들이 있기에 생각지도 않았던 색깔을 선택한 걸까. 가만히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았다. 초등학교 통지표에 적혀 있던 ‘준법정신’이 강하다는 문장이 생각났다. ‘모범’이라는 단어도. 열 살 안팎의 어린아이가 준법과 모범이라는 틀 속에 갇혀 있는 모습이 떠올랐다. 가엾다. 어른들이나 선생님에게 꾸중 듣지 않는 아이여야 한다는 생각을 했던 걸까. 기질적으로 그런 아이였던 걸까.
기질적으로 그런 아이는 아니었다. 나는 돌발적인 면도 가지고 있으므로. 내가 나를 모를 리 없다. 남들과 비슷하거나 같은 것을 기피하는 성향이 있다. 옷도 유행하는 것을 선호하지 않았다. 기성복을 사면 어딘가 수를 놓거나 레이스를 달아 다르게 만들어 입었다. 도드라지는 것을 선호해서 그런 것이라기보다 평범한 것을 싫어해서 그랬던 것 같다. 어릴 적에 어머니에게 자주 들었던 게 까다롭다는 말이었다. 말썽을 부리거나 손이 가게 하지 않았으나 개성 없는 아이는 아니었던 듯하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달라졌다. 내 개성을 드러낼 여유가 없었다.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바쁘기도 했지만 관심 두는 분야에 성실하고자 했다. 옷, 음식, 주거 등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의식주가 생활양식의 기본인데. 옷은 있는 것 아무거나 입었고, 음식도 허기만 속이면 되었으며, 사는 곳 또한 이슬만 가리면 된다는 생각으로 살았다. 집안 꾸미는 것에, 먹는 것에, 입는 것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렇게 살다 보니 세월이 흘렀고, 이제야 어릴 적에 가졌던 그 개성이 고개를 든 걸까. 뜬금없이 노란색 샌들이라니.
가족 단톡방에 의견 묻는 메시지를 남겼다. 나 노란색 샌들 샀어, 그냥 신을까 교환할까? 아들, 뭐 어때요. 새롭게 신어보시는 것도 좋아요. 딸, 그냥 신어. 아무도 관심 없어! 어이상실이다. 딸에게 전화했다. 그게 뭐냐고. 의견을 묻는 건데 이왕이면 성의껏 답해주면 어디 덧나느냐고. 그게 자기 의견이란다. “엄마, 아무도 관심 없다고. 남의 일에 누가 그렇게 관심을. 더구나 샌들 하나에. 그냥 신든지 말든지 맘대로 하시라고요. 그깟 일로 무슨 전화까지. 끊으시오.” 참나, 전화했다가 기분만 더 나빠졌다.
딸의 말이 맞긴 맞다. 더 이상 이야기해 봐야 쿨 하기 그지없는 그녀가 내 기분 살피면서 말하지 않을 건 뻔했다. 그래, 이제 딸은 그녀다. 삼인칭이다. 소심한 복수다. 내가 할 수 있는. 전화를 끊고 구시렁댔다. 내가 남의 시선을 의식하고 말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생경하지만 시도해 본 건데, 잘 어울릴 것 같다고 말해주면 안 되나 싶었다. 냉정한 그녀, 필요하다고 할 때 달려가나 봐라.
노란색 샌들을 신고 외출했다. 학교에 있을 적엔 생각지 못했는데. 겨자 색 마 소재로 된 셔츠를 입고, 아이보리색 마 바지를 입고, 노란색 샌들을 신었다. 거울에 비친 모습이 시원해 보였다. 샌들은 아주 편했다. 그날 만난 친구는 깔 맞춤한 것처럼 잘 어울린다고 했다. 밝은 색깔이 잘 받는다며. 무채색 옷만 입고 신을 때는 몰랐는데, 기분이 다르다. 밝은 색은 마음까지 밝게 만드는 것 같다.
딸, 그녀의 말은 틀렸다. 아무도 관심 없다는 그 말은. 전화해서 소리치고 싶었다. 나 아직 안 죽었어! 이거 왜 이래,라고. 알지도 못하면서 맘대로 재단한 그녀에게, 내가 이제 관심을 두지 말아야 하리라. 그래도 정작 말을 못 하고 속으로만 이러쿵저러쿵. 이 무슨 품위 없는 짓인지. 속으로 웃음이 나왔다. 더운 여름, 웃음으로 날리고 시원하게 보낼 것 같다. 노란색 샌들 덕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