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도 한 소쿠리
한 소쿠리나 되는 앵두로 무엇을 할까. 할 수만 있다면 그 맛, 그 향, 그대로 즐기고 싶었다. 그 상태로 보관할 수만 있다면. 워낙 원재료 그대로 먹는 걸 가장 선호하는 나다. 파프리카, 오이, 고추, 당근, 양배추 등을 조리하지 않고 먹는다. 과일은 더구나. 저 앵두도 작지만 과일 아닌가. 하지만 금세 물러지니 그럴 수 없고.
일단 깨끗이 씻었다. 살살 흔들어가면서. 촉감이 좋다. 보드랍기가 비단결 같은 앵두. 온이와 촉감놀이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한 움큼 입에 넣고 우물거리다가 과육을 쭈욱 삼켰다. 새콤하고 달콤한 맛이 향과 함께 입안에 가득하다. 꽃잎이 화르르 피어나는 것을 보는 느낌, 분홍 하트가 우우우 날아가는 게 연상되는 맛. 그렇다. 그것으로 다 형용할 수 없는 맛과 향이다. 씻다가 한 움큼 입안에 가득, 또 건지다가 한 움큼, 쉴 새 없이 앵두를 먹었다.
무엇을 해야 하나. 목표를 정하고 일을 진행해야 한다. 인터넷 검색을 했다. 앵두의 효능에 대한 글이 몇 군데 올라와 있고, 대부분 앵두잼과 앵두술 담그는 법에 대한 정보다. 좋아, 결심했어, 난 세 가지다. 하나, 앵두잼. 둘, 앵두술. 셋, 원재료로 먹기. 원재료 그대로 보관하고 먹는 거야 그렇더라도, 잼과 술을 나만의 방법으로 해볼 생각이었다.
먼저, 잼이다. 그래도 명색이 가정학사 아닌가. 가정학과에 다니던 그때, 오래오래 전 그때, 배웠던 지식을 모두 소환해 보기로 했다. 아, 기억나는 게 별로 없다. 단, 과일로 잼을 만들 경우 꼭 껍질이 들어가야 한다던 게 생각났다. 껍질에 펙틴이라는 성분이 있는데, 그것이 잼이 되게 한다던. 물론 그 작은 앵두의 껍질을 벗길 방법이 있다던가. 당연한 거지. 피식 웃음이 났다.
본격적으로 앵두잼 만들기에 들어갔다. 큰 냄비에 씻은 앵두를 푹푹 삶는다. 앵두 씨를 빼고 삶으면 그대로 끓여도 되는데, 그 많은 앵두 씨를 무슨 재주로 뺀단 말인가. 인터넷은 정보의 바다다. 너튜브나 웹 사이트에 앵두 씨 빼는 방법도 올라와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일일이 할 수 있는 분량이 아니다. 포기.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은 삶은 후 씨앗이 빠지지 않을 정도로 성근 소쿠리에 넣고 으깨는 것. 결국 삶은 앵두를 식힌 후, 그렇게 씨앗을 추출했다. 팁 하나, 삶을 때 앵두가 잠기기 않을 정도로만 물을 붓고, 삶은 후 그 물은 절대 버리면 안 된다는 것.
앵두 씨를 꼭꼭 눌러, 붙은 과육을 모두 뽑아냈다. 약간 걱정도 되었다. 딸기잼이나 사과잼 포도잼을 만들어 본 적 있지만 앵두잼은 처음이기 때문이다. 온이에게 잼 만들어준다고 큰소리 탕탕 쳤는데, 제대로 안 되면 어떡하나 싶었다. 앵두 따던 날, 온이는 요리활동하자고 몇 번이나 졸랐다. 그럴 시간이 없었기에 잼 만들어서 갖다 준다고 하니 우와! 잼을요? 하면서 좋아했다. 그랬는데. 처음 만들어보는 거라서 염려되었다.
씨를 발라내고 과육 맛을 보았다. 히야, 이건 뭐 천상의 맛이 아닌가. 새콤하고도 달콤한 앵두 본연의 맛에, 끓으면서 더해진 부드러운 맛까지. 달았다. 설탕을 넣지 않아도 될 정도로. 잠시 고민에 빠졌다. 설탕을 넣지 않아도 될까, 되지 않을까. 결론은 잼이 되려면 필수적으로 설탕이 필요할 것 같았다. 인터넷 검색은 하지 않았다. 내 상식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얼마를 넣을까. 가끔 신경 쓰이게 하는 혈당을 생각하면 최소한으로 넣어야 한다.
다시 과육과 즙을 끓인 후, 넣은 듯 만 듯할 정도로 설탕을 넣었다. 안 넣어도 되련만 혹시 잼이 안 될까 봐 조금 넣었다. 이제 중불에서 끓인다. 긴 나무 주걱으로 젓는다. 20분이 지나고 또 20분이 지났다. 한 시간이 지났다. 별로 반응이 없다. 주걱으로 내용물을 들어보니 주르르 물처럼 흘러내린다. 안 되겠다. 더 졸인다. 30분 정도 지난 것 같다. 팔이 약간 뻐근하다. 그래도 계속 저었다.
한 시간 반쯤 지났을까. 약간 걸쭉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오호, 잼이 되고 있다. 변화시점이 있는 것 같았다. 좀 전까지 아무런 변화가 없었는데, 어느 순간에 갑자기 변화가 왔다. 나는 왜 그 순간에, 나아만 장군이 요단강 물에 몸을 담그던 성경의 장면이 떠올랐을까. 문둥병을 앓는 나아만 장군은 요단강 물에 몸을 일곱 번 담그라던 엘리사 선지자의 말을 따랐다. 그러나 여섯 번째까지 아무 변화가 없었고, 일곱 번째 담그자 깨끗하게 낫는 장면 말이다.
조금 더 졸인 후 식는 동안, 잼 담을 병 소독을 했다. 앵두잼의 맛은 세상에서 처음 맛보는 신비로운 맛이었다. 흐뭇하기 이를 데 없었다. 온에게 전화를 했다. 잼 완성되었다고. 다음에 갈 때 선물로 갖고 가겠다고. 우와! 소리치는 온의 목소리를 들으니 더 함함했다. 완전히 식힌 후 잼은 더 걸쭉해졌다. 설탕이 아주 조금 들어가도 잼은 만들어졌다. 온이들도, 나도, 잘 먹을 것이다. 어머니는 단 것을 안 드시기에, 큰 병 두 개에 나누어 담았다. 온이네 갈 날이 기다려진다.
이제 앵두술을 담가야 한다. 소주를 부을까, 그대로 설탕만 조금 넣고 발효시킬까 궁리했다. 퍼뜩 떠오른 생각. 냉장고 깊숙이에 2년째 들어 있는 막걸리. 막걸리라 해도 위에서 뜬 맑은술이다. 강릉에 갔다가 얻어온 것인데, 아무도 안 먹어서 그대로 있다. 그것을 이용하기로 했다. 뚜껑을 열어 맛을 보았다. 청주 같은 맛이다.
역시 병 하나를 소독해서 맑은 막걸리를 부었다. 그리고 물기를 제거한 앵두를 삼분의 이쯤 넣었다. 설탕을 넣지 않았다. 앵두가 많이 들어갔으니. 잼 만드는 데 세 시간 넘겨 시간이 소요되었는데, 술 담그는 건 금방이다. 일주일만 되어도 먹을 수 있다던데, 혹시 불면의 밤이 온다면 한 잔씩 해야겠다. 앵두에 들어 있는 효능이 내 몸속으로 고스란히 들어올 것 같다.
남은 앵두는 원재료 그대로 먹을 것이다. 소분해서 작은 통에 담았다. 하루에 너무 많이 먹으면 배탈 나는 부작용이 있을 수 있단다. 200g이 안 될 정도로 나누어, 냉장고 채소실에 넣어두었다. 잼도 좋고 술도 좋지만 나는 무엇보다 그냥 먹는 게 가장 좋다. 한 움큼 입에 넣고 깨물면 입 안 가득 그 새콤달콤한 맛이 가득 찬다. 향을 느끼며 앵두즙을 삼킬 때 행복함이라니. 그 느낌을 며칠간 느낄 수 있을 터이다.
이제 끝. 모든 일이 끝났다. 우리 집 냉장고에는 앵두와 앵두잼이 들어 있고, 다용도실에는 앵두술이 익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