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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선수범, 맨발 걷기

숲을 느끼다

by 최명숙


숲으로 들어왔다. 혼자가 아니다. 강, 유, 박, 임 선생과 함께. 먼저 산길을 걷고 싶다고 한 사람은 유 선생이었다. 그 말에 너도 나도 좋단다. 만장일치. 망설임 없이 산에 올랐다. 밖은 찌는 듯 더웠지만 산은 그렇지 않았다. 은성한 나무들이 검푸르고 산바람이 살살 불었다. 숲 내음. 숨통이 트이는 듯했다.


그 넷은 학교 밖에서 만나 거의 십 년 가까이 내 강의를 수강하는 제자들이다. 몇 년이 흐르면서 유 선생은 수필가로 등단했고, 그 외의 제자들은 등단 준비 중이다. 그들은 ‘수강생’이 아니고, 진즉에 내 ‘제자’가 되었다. 시간이 허락하는 한 어떤 강의든 내가 하는 것이라면 듣는 사람들. 무엇보다 선생의 마음을 잘 알아차린다. 그리고 뜻대로 하려고 애쓴다. 그것을 알기에 더 좋은 작가가 될 수 있도록, 나는 어쩌다 선생노릇을 한다. 따끔한 소리, 칭찬, 격려, 조언 등.


가끔, 내가 이렇게 할 필요가 있을까 싶은 적도 있다. 적당히 치하하고 적당히 조언하면 될 텐데, 그저 적당히 거리를 두면서. 그게 안 된다. 내 욕심이다. 성인이 되어 만난 사람들인데 스무 살짜리 대학생에게 하듯 그럴 필요가 없는데. 심지어 지금 학생들에게도 제대로 선생노릇하기 힘든 실정이다. 조금만 마음에 안 들면 대나무 숲인지 전나무 숲인지에 대고 토로하는 세상이니. 물론 다는 아니다. 아무튼 그들에게 난 애정을 갖고 있기에 하는 행동이고 마음인 것만은 틀림없다.


숲으로 들어오게 된 연유는 이러하다. 아들 전시회에 다녀와 이른 저녁을 먹고 난 후였다. 이제 헤어져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점이었다. 누군가가 말했다. 나를 집에까지 모셔다 주고 가야 한다고. 모셔다 주다니, 내가 집에도 못 찾아갈까 보냐고 했다. 그래도 안 된단다. 배가 부르니 소화시키고 운동도 할 겸 걸어야 한다고. 마침 대모산 입구였다. 그렇게 의기투합하여 숲으로 들어갔다.


숲에 나 있는 오솔길을 걸으며 우리는 웃었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산은 맨발 걷기의 성지라는 내 말에, 강 선생이 맨발 걷기를 해보고 싶단다. “그럼 벗으면 되죠.” 내가 먼저 솔선수범. 역시 선생은 어디서나 솔선수범해야 한다. 샌들을 벗었다. 최근에 산 노란색 샌들을. 시원했다. 부드러운 흙이 나를 감싸 안는 듯도 하고. 너도 나도 벗었다. 머뭇거리던 유 선생까지 모두. 환호성이 터졌다. “우와! 이런 느낌이군요. 아주 좋아요.” 앞서 길을 안내하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이러니 제자들 아닌가. 불평하거나 갈등하는 사람들은 없었다. 맨발 걷기 체험, 처음 해본다며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느낌이 좋고 할 만하단다. 웃고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며, 산새들의 노래를 들었다. 산바람을 맞았다. 발바닥을 통해 온몸으로 전달되는 흙의 느낌, 부드러우면서 시원했다. 숨을 깊이 들이쉬고 길게 내쉬었다. 몸속에 있는 삶의 찌꺼기들을 모두 뱉어내는 느낌이었다. 모두 그렇게 느끼고 있는 것일까. 잠시 말이 없었다.


산에서 내려오는 등산객 중 반 이상이 맨발이었다. 역시 이 산은 맨발 걷기의 성지다. “앗! 따가워요.” 임 선생이 엄살을 부렸다. 돌멩이 뾰족한 부분에 발바닥이 닿았나 보다. “음, 그건 뇌 세포를 깨우는 거랍니다. 지압한다 생각하고 즐거워하세요.” 그러냐며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그런지 저런지 잘 모른다. 얻어들은 대로 말했다. 이러다 몽학선생이 되는 건 아닌가 싶었다. 뭘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말하니. 속으로 웃음이 나왔지만 시치미 떼고.


맨발로 3km 정도 걸은 것 같다. “이제 신발 신고 싶은 사람은 신어요. 등산로에 자갈이나 돌 부스러기가 조금 있는 곳이니까요.” 내 말에 몇은 신었고 몇은 나를 따라 맨발로 걸었다. 느낌을 물었다. 생각보다 발바닥이 아프지 않고 시원했단다. 오늘밤 잠 잘 거라고 했더니 유 선생이 원래 잘 잔다고 해서 와르르 웃었다. 하긴 아직 젊은 사람들이니까. 더 맨발로 내려가다 물이 고여 있는 작은 웅덩이에서 발을 씻었다. 물은 깨끗했고 차가웠다. 개운했다. 손수건으로 물기를 닦고 샌들을 신었다.


우리 집이 보였다. 집에 가서 차를 마시든지 근처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겠느냐고 물었다. 모두 아니란다. 저녁 일곱 시가 되어가고 있었다. 다음에 또 맨발 걷기를 하고 싶다고 했다. 언제든 그러자며 손을 흔들었다. 버스 정류장을 향해 멀어져 가는 제자들의 뒷모습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내가 이끄는 대로 군말 없이 따라와 준 그들, 맨발로 걷는 게 속으론 망설여졌겠지만 내가 신발을 벗으니 따라한 그들이 더욱 소중하게 다가왔다.


새로운 경험이었고 모두 좋았다고 하는 맨발 걷기. 맨발로 땅을 디디고 서듯, 그들의 글쓰기도 그렇게 자연스럽고 시원하고 당당해졌으면 한다. 그날까지 나는 선생으로서 이끌어주고, 솔선수범, 본을 보여야 하리라. 내가 매일 이렇게 되는 안 되든 글을 쓰는 것도 그 이유다. 밥 먹듯이, 숨 쉬듯이 글을 써야 한다고, 간단없이 써야 한다고, 말해놓고 안 하면 나 스스로 당당하지 못한 처사가 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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