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하는 길
물안개가 피어난다. 마을 앞을 흐르는 개울에. 비는 그쳤고 간헐적으로 는개만 조금씩 오락가락. 덮인 비구름으로, 오후부터 어둑어둑했다. 저녁은 더욱. 가로등만 흐릿하게 어둔 산책로에 비취고, 산책자들은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물안개가 피어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며칠 동안 제대로 걷지 못해 나선 참이었는데, 물안개를 보다니. 운치 있는 풍경을 보며 옅은 탄성이 나왔다. 저절로.
아름답다. 뽀얗게 연기처럼 피어나는 물안개는 어릴 적에 가졌던 내 꿈과 같다. 저녁나절 마을 앞개울에서 교복을 빨면서, 막연히 미래를 떠올리며 꿈을 꾸었다. 이렇게 살고 싶고 저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그러다 보면 어느새 어둑해졌고, 다슬기가 돌 틈에서 슬금슬금 나와 느릿느릿 기어 다니고 있었다. 내가 꾸었던 꿈도 그렇게 늦게 느릿느릿 이루어졌다. 우리 마을 앞개울에서 물안개가 피는 것을 본 적 없다.
물안개를 처음 본 것은 오래전 여행길에서였다. 설악산에 가기 위해 새벽에 양평쯤 지날 때였다. 남한강에 물안개가 피어나고 있었다. 옆에 앉은 남편을 슬쩍 보았다. 그도 물안개를 보고 있었다. 아름답죠? 내 말에 그는 고개만 끄덕였다. 그렇게 양평을 지났고, 홍천을 거쳐 미시령과 한계령으로 나눠지는 곳까지, 강과 개울에서 물안개가 피어났다. 강원도 산이 갖고 있는 특성과 어울려 낭만적이고 몽환적으로.
내가 사는 이 마을 앞개울에도 물안개가 피다니, 횡재를 만난 기분이었다. 감동적. 양평에 가지 않아도, 남한강과 홍천강을 지나지 않아도, 저녁나절에 물안개를 볼 수 있다니. 분명 새벽에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새벽 산책을 하지 않는 나지만 불쑥 나서고 싶은 의욕까지 일었다. 골이 깊은 곳에 있는 개울이라 물안개가 피는 것일까. 뒷산과 앞산 그 가운데 개울이 있고 우리 마을이 있으니까.
처음 이 동네로 이사했을 때, 특별한 것은 안개였다. 새벽에 일어나 보면 안개가 자주 끼어 있곤 했다. 그 자욱한 안개를 보며 소설 <무진기행>과 <도가니>를 떠올렸다. 예측할 수 없는 나의 미래와 겹쳐지면서 불안감을 느끼기도 했다. 때론 나 또한 누구에게든 보이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안온함도. 양가적 감정 속에서 나를 세우려고 무던히 노력했다. 가족들도 모르는 일이다. 차츰 걷히는 안개처럼 앞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고, 흔들림 없이 앞을 향해 걸었다.
물안개를 찍었다. 가로등 불빛과 지나는 차량 불빛도 함께 찍혔다. 걷는다. 아무도 없는 개울가 산책로, 호젓하다. 반환점을 돌 즈음 서 있는 한 남자를 보았다. 개를 데리고 나왔다. 개는 물속에서 헤엄을 쳤다. 쿡, 웃음이 나왔다. 저게 바로 개헤엄이다. 저 개헤엄은 나도 칠 수 있다. 우리 고향마을 앞개울에서 멱 감을 때, 치던 헤엄이 바로 저 개헤엄이었으니까. 사람은 없고 개가 헤엄을 치다니, 우습지 않은가.
반환점을 돌 때, 세찬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우산을 챙긴 게 다행이었다. 반환점을 향해 갈 때 보았던 남자는 물속에 있는 개를 끌어당겼다. 개는 버둥거렸다. 더 놀고 싶은 모양. 남자는 힐긋 나를 보았다. 무심하게 지나쳤다. 내가 관심을 갖는 게 있다면 사람보다 개다. 흐릿한 가로등 불빛 아래서도 개는 잘 보였다. 개의 눈과 내 눈이 마주쳤다. 슬퍼 보였다.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목줄을 당기고 있었다. 내 목이 답답해지는 것을 느꼈다.
내 목줄을 당기고 있는 것들도 있으리라. 내 마음대로 살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것들. 어느 누구라고 그렇지 않으랴. 삶은 그래서 지난한 것일까. 삶을 성찰하는 것은 때로 슬프다. 약간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참았다. 눈물까지 흘릴 필요 없다. 감상적으로 흐르는 기분을 경계해야 하리라. 솔직한 것도 좋겠지만 속을 보이지 않는 것도 이젠 내게 필요하다. 이렇게 글로 쓸지언정, 행동으로는.
물안개 사진을 찍었던 곳에 왔다. 어떤 남자가 나처럼 물안개를 찍고 있다. 약간 동질감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이렇듯 정서가 비슷한 사람들이 있다. 한 여자가 지나가다 잠시 멈춘다. 비는 그쳤다. 아직도 우산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그제야 알고 우산을 접었다. 물안개를 한참 쳐다보았다. 양평과 홍천강, 고향마을과 문학작품의 배경으로 나온 곳을 떠올리며. 그리운 이들도 떠올렸다.
집으로 돌아와 창가에 서서 개울 쪽을 바라보았다. 물안개가 올라와 어두워진 마을에 옅게 퍼지고 있었다. 홑이불처럼 마을을 덮는다. 가벼운 물안개 이불을 덮고 깊은 잠에 들 것 같은 저녁이다. 안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