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가 끝났다. 엊그제부터 불볕더위가 계속되고 있다. 만나는 사람마다 덥다고 난리다. 덥다는 말이 인사를 대신하기도 한다. 더운 건 맞다. 숨이 턱턱 막히는 순간도 있다. 그 정도로 덥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이 정도 더위에 그렇게 호들갑 떨고 싶지 않은 게.
한 오 년 전에도 그렇게 더웠다. 그것도 유월부터. 솔직히 말해 욕조에 찬물을 받아 놓고 몸을 담그기도 했다. 그것도 한 번만이 아니다. 다시 더워지면 다시 또 욕조에 들어가곤 했다. 하루에도 서너 번씩. 그때도 나는 견딜 만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에어컨을 설치하지 않았다. 단출하게 지내면서 굳이 에어컨을 설치하랴 싶었다. 아이들은 성화를 했지만 꿋꿋하게 그 생각을 지켰다.
그러다 작년에 딸이 이사하면서 쓰던 것을 갖다 설치했다. 아들이 들어오면서 짐을 정리 정돈할 때 며칠 빼고 에어컨을 사용한 적 없다. 그만큼 살만하기 때문이다. 견딜 수 없으면 사용하는 게 맞다. 나 역시 그랬을 거다. 나만 그런 것 아니다. 아들도 의외로 덥지 않단다. 집이 산 아래에 있고, 높은 층에 있어서 그런 것 같다.
나는 더위를 잘 견디는 편이다. 온몸에 땀이 줄줄 나고, 달아올라도 견딘다. 그건 두 개의 기억 때문인 듯하다. 그때를 생각하면 이만한 더위쯤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선택할 아무것이 없고 그것을 벗어날 길도 막연했던 기억. 암담하면서도 묵묵히 견뎌야 했던 그 기억을 떠올리면 지금은 어떤 조치든 할 수 있다는 것이 더위를 견디게 하는 걸까. 어떤 조치라는 건, 시원한 음료를 마실 수 있고, 시원한 장소에 갈 수 있고, 내가 있는 곳을 시원하게 만들 수 있다는.
첫 기억은 여섯 살 즈음이다. 그때 나는 고모와 함께 고모 친구의 집에 가고 있었다. 미루나무가 늘어선 신작로를 고모와 함께 타박타박 걸었다. 신작로에는 온통 자갈이었고, 발바닥이 아팠다. 더구나 뜨거운 햇볕이 온몸에 쏟아졌다. 고모가 내 손을 잡고 양산을 들었다. 뜨겁고 목이 말라 울고 싶었다. 그래도 그럴 수 없었다. 더구나 나는 왜 치마저고리를 입었을까. 남의 집에 간다고 어머니가 단장을 해주신 것 같았다. 치마저고리가 온몸에 들러붙어 걸음을 옮길 적마다 휘감겼다.
그때 고모는 서울에서 직장에 다니고 있었다. 휴가를 내서 집에 왔다가 결혼한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언젠가 물어보니 고모도 그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날 유난히 더웠다는 것도. 그러고 보면 내 기억이 왜곡된 것은 아니다. 양산을 쓰고 뾰족구두를 신은 고모 역시 자갈이 덮인 신작로를 걷기 힘들었으리라. 나를 데리고 나선 건 심심하기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유난히 나를 귀여워해서였으리라. 버스를 타고 이십 리 길을 간 후, 다시 걸어서 십 리 족히 걸어가야 하는 곳이었다고 한다.
내가 힘들어하자 고모가 나를 업었다. 내가 양산을 들고. 양산을 드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때 나는 겨우 여섯 살이었으니까. 또 고모가 힘들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후 내려달라고 했다. 고모가 빙긋 웃으며 내려놓을 때,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보았다. 다시 또 걸었고, 업혔고, 또 걸었다. 매미소리가 요란했으며 간혹 부는 바람이 반가웠던 기억이 난다. 얼마 후 고모 친구의 집에 도착했고, 펌프에서 퍼 올린 시원한 물을 마셨다.
두 번째 기억은 어머니와 함께 고구마 밭을 매던 날이었다. 동악산 따비밭은 유난히 돌이 많은 밭이었다. 담배 밭에선 분홍색 담배 꽃이 수줍게 피어 땡볕에 시들 거리고, 넓적한 잎사귀를 척 늘어뜨렸다. 그늘에 놓아둔 물주전자의 물은 금세 데워졌다. 그 물을 마시며 어머니와 나는 고구마 밭을 맸다. 산비둘기 울음이 산자락을 타고 내려왔고, 앞의 오동나무에선 매미가 울었다. 그 더운 여름에 왜 우리는 고구마 밭을 매러 갔던지.
어머니는 몸이 약했다. 조금 매다가 땀이 비 오듯 쏟아지자 오동나무 아래로 갔다. 내게도 와서 쉬자고 하셨다. “엄마는 쉬어, 난 그냥 할래요.” 그건 어렸을 적부터 내 성향이었던 것 같다. 도중에 일을 쉬지 못하는. 이번에 집 정리 정돈할 때도 아들과 부딪친 부분이 그것이다. 아들은 쉬엄쉬엄 정리하자고 했고, 나는 어서 빨리 하고 쉬는 게 낫다고 했다. 아들은 그게 왜 힘든 것인지 조목조목 따져가며 논리적으로 설득했다. 그래도 나는 내 방식대로 하기를 원했다. 그러다 손목에 병이 나고 말았지만. 어머니는 나무 그늘에서 쉬면서 안타깝게 나를 불렀다. 더위 피했다가 매자고. 난 거부했다. 어서 빨리 하고 집으로 가서 쉬고 싶었다.
얼마나 덥고 숨이 차며 힘들었는지 모른다. 한 이랑을 맬 때마다 고민했다. 쉴까, 말까. 어머니는 도저히 안 되겠던지 잠시 후 일어나 오동나무 그늘에서 나와 밭고랑으로 들어섰다. “에구, 너 때문에 쉬지도 못하겠다.” 어머니는 푸념 아닌 푸념을 하며 밭을 맸다. 저녁나절이 되었을 때, 두 이랑이 남았다. 어머니는 이제 내일 하게 그만 가자고 했다. 거절했다. 겨우 한 이랑씩만 매면 내일 안 해도 되는데, 다 하고 가자고. 어머니는 할 수 없이 나를 따랐다. 어스름이 내릴 때, 모두 끝났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두 기억을 떠올리면 이런 더위쯤이야 아무것도 아니다. 지금은 선풍기가 있고, 에어컨이 있으며, 시원하게 샤워를 할 수 있지 않은가. 더 힘들고 어려웠던 날을 견뎠다. 그것을 잊지 않으면 약이 된다. 여유로움이 된다. 그날들을 생각하면 이쯤 더위는 아무것도 아니다. 이렇게 스스로 다독이며 더위를 이기고 있다. 이게 내가 더위를 견디는 방법이다. 굳이 견디고 말 것 없이, 환경을 시원하게 만들 수도 있지 않은가. 그것은 최후의 보루로 남겨둔 채. 여름이니까 더운 것 당연하다.